옷은 가장 사적인 상상이다
“어릴 적부터 내 공간을 꾸미는 걸 워낙 좋아했고, 잡지를 보며 혼자 상상한 걸 현실로 만드는 일이 즐거워 놀이 처럼 일했어요. 좋아하니까 조사도 많이 하고, 열정과 에너지를 갈아 넣어서 옷을 만들어도 다음 시즌 이 오면 또 새로운 상상이 떠올라요.”
탐베레가 다양한 시도와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건, 디자인 실장님의 새로움을 향한 열정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 져요. 실장님의 유년 시절이 궁금해요.
지연 아기자기하고 예쁜 물건에 열광하는 어린이였어요. 공책과 책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려 넣기 일쑤여서 할아버지께서 “너는 디자이너 아니면 뭐 하겠니?”라고 하셨어요. 초등학교 때는 동네 수예점에 혼자 찾아가서 핸드메이드 공예를 배우기도 했죠. 늘 그리고, 만드는 아이였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매거진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미국 매거진, 일본 패션 매거진들을 정말 좋아했어요. 명동 중국대사관 근처에 잡지 골목이 있는데, 늘 그 거리를 배회했어요. 얼마나 좋아했냐면, 가세가 기울어 부모님과 떨어져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낸 적이 있거든요. 시골에서는 잡지를 못 보니까 어머니에게 논노 잡지를 사서 보내달라고 부탁했어요. 어머니가 매달 그 약속은 지켜주셨어요.
부모님이 잡지를 시골로 배송해 주실 정도면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게 명확한 아이였나 봐요.
지연 맞아요. 그때는 지금처럼 배송 서비스가 편하던 시절이 아닌데, 제가 워낙 잡지를 좋아하는 걸 아셨어요. 왜 그렇게 좋아했냐 생각해 보면 예쁜 걸 너무 좋아하는데, 모두 사거나 입어볼 수 없는 거죠. 현실에서 보지 못하는 예쁜 집, 신기한 옷, 매력 적인 스타일 등을 보며 대리만족했어요. 좋아하는 장면을 모으고 찢어 붙이면서 나만의 보드도 만들고, 책 덮개로 싸면서 잡지와 함께 생활했어요. 직업은 취미가 아니라 지속해야 하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디자이너를 꿈꿨어요. 어떤 남다른 감각이 있었다기보다 계속 해도 하고 싶은 거를 일찍 찾은 편이죠. 입시 미술을 준비했는데 의류학과는 이과 계열이어서 섬유공예과에 진학해 부전공으로 의류학을 공부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입학해 보니 제가 꿈꾸던 것과 달랐어요. 실질적인 옷을 만들고 싶은 데 원론적인 교육 중심이었죠. 지금은 이론도 정말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그때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답답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지연 아니요. 텍스타일 회사에 합격을 하고 출근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부르셨어요. 회사에 나가지 말고 네 사업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여장부 스타일로 의지가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에요.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액세서리 매장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같이 하면 재미있을 거 같더라고요. 매장을 운영하며 액세서리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을 확장해 갔어요. 옷은 아이를 낳고 만들기 시작했어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때를 기다린 건가요?
지연 그런 셈이죠. 옷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다가, 엄마가 되어 매일 아이 옷을 만지면서 아동복에 관심이 생겼어요 . 관심사가 나에서 아이로 변화는 시기가 있잖아요. 첫째가 좀 예민한 아이였어요. 옷을 입을 때 두상이 커서 힘들어 했고, 일반 넥은 답답해했어요. 트임이 있는 옷을 찾아 입히다 마음에 드는 옷을 구하기 어려워서 직접 티셔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처음 만든 옷은 ‘입술넥’이라고 목이 늘어나는 옷이에요. 단추를 달아 넥라인을 오픈 할 수 있는 옷도 만들었고요. 아동복을 만들어 보니 제한이 적고 상상하는 대로 만들 수 있어서 적성에 잘 맞더라고요. 또 아이들은 뭘 입어도 다 예쁘니까 결과물도 아주 만족스러워요. 어릴 때부터 간절하게 꿈꿨던 걸 돌고 돌아서 하게 되는 게 신기해요.
누구나 처음은 서툰 법이잖아요. 미숙함을 견뎌낼 힘은 어디서 얻었어요?
지연 첫째 아이가 두세 살 때 만들고 싶은 제품을 구상했고, 둘째 임신 기간에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어요. 액세서리 매장을 하면서 옷을 기획하느라 일본에 출장을 갔어요. 첫째가 저랑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고 모유수유를 할 때라, 아이를 데리고 하라주쿠에 갔어요. 겨울이었는데 유모차를 안 타 포대기를 하고 코트로 등을 덮어서 아이를 업고 다녔어요. ‘이 멋진 거리에서 나도 멋쟁이들처럼 배회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를 업고 구석구석 탐색하던 제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요. 아이 옷을 정말 예쁘게 잘 만들고 싶었거든요.
옷을 향한 열정이 가득했네요. 첫 옷이 나왔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지연 처음에는 만드는 과정의 프로세스를 몰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학교에서 이론을 배웠지만 원단 시장에서 쓰는 용어는 완전히 달라요. 패턴을 뜨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여쭙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전문가에게 물어 찾아가면서 옷을 배웠어요. 줄무늬 입술 티셔츠를 만들고 이걸 좋아해 주실까 엄청 초조했던 기억이 나요. 다음 아이템은 거즈 원피스였어요. 거즈 소재는 세탁 하고 나면 소재가 살아나서 촉감이 정말 좋거든요. 아이 옷으로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저는 꼭 원피스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옷만 만들어서는 제가 상상한 느낌이나 장면을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인테리어 소품을 곁들어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머릿속으로 그려온 광경을 연출하고 싶어서 촬영을 하고, 사진을 인화해 공간에 붙여뒀죠. 당시는 그렇게 옷을 소개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신선하다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어요.
상상을 포착해 장면으로 재구성하는 거네요. 잡지 속 한 페이지처럼요.
지연 어릴 적부터 내 공간을 꾸미는 걸 워낙 좋아했고, 잡지를 보며 혼자 상상한 걸 현실로 만드는 일이 즐거워 놀이처럼 일했어요. 좋아하니까 조사도 많이 하고, 열정과 에너지를 갈아 넣어서 옷을 만들어도 다음 시즌이 오면 또 새로운 상상이 떠올라요. 저에게 일은 힘듦보다 힘을 주는 존재예요.
좋아하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 궁금해요.
지연 여유 있고 즐거운 삶을 지향하지만 현실은 늘 치열하고 급하고 바빴어요. 그런데 돌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과 나에게 중요한 가정을 병행하는 삶이 나를 지키는 수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아와 가정에서 잠시 숨돌리는 곳이 일이고,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의 등장에 무조건 달려 나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힘낼 수 있었거든요. 일의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애쓰는 편인데, 관계가 힘들면 조용히 시골에 내려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안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염려가 많은 편이라 혼자 가는 여행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정말 좋아해서 홀로 보내는 시간이 휴식이 될 줄 몰랐어요. 올해는 가족들과 휴가를 마치고 홀로 4박을 더 머물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혼자 산책하고 친구가 추천해 준 책도 읽었어요. 정기적으로 이런 시간을 가져보려고 해요.


미지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새처럼
“우리가 만드는 옷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디자인에 드러나지 않는 과정을 나누고 싶어요. 설령 한두 개 아이템일지라도 정성을 다해 이야기하려고요.”


탐베레는 작업 과정의 7할 이상을 아이디어 구상에 쓴다고 했는데요, 시즌마다 새로운 소재와 콘셉트, 스토리를 어떻게 포착
하나요?
운혁 예를 들어 주제를 ‘메리 앤드 로라’로 정하고, 메리와 로라라는 가상 인물을 상상해요. ‘메리는 이런 성향이니 이런 디자인 의 옷을 입을 거야. 로라라면 어떤 장식을 좋아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하죠. 디자인하면서 촬영 이미지도 함께 구상하는 편이에요. ‘이 옷의 느낌을 잘 전달하려면 단체 사진이 필요하겠다. 정형화되지 않은 이런 컷도 있으면 좋겠네.’ 탐베레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는 각각의 테마들이 있고, 색깔이 있지만, 매 시즌 인풋을 우리만의 상상으로 풀다 보니, 다른 브랜드보다는 하나의 브랜드 안에서 변화의 범주가 넓은 편이에요.
윤희 실장님은 축적된 아이디어에 새로운 것을 적절하게 더할 줄 아는 분이에요. 그래서 환기를 중요하게 여겨요. 사실 매일 출근 하여 같은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나오기 힘들거든요. 그럴 때면 “종로에 전시회가 열려. 탐베레 팀 택시 타고 다녀 와.” “커피 마시고 올래? 나가서 수다 떨고 와.” 이렇게 말씀하실 때도 있고요. 독일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도 전시관이나 미술관 투어를 리드해 주셨어요. 영감이 닿아 상상할 수 있도록 저희를 던져 놓으세요.
지연 우리는 예술가는 아니잖아요. 디자이너로서 시대와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계속 변화하고 고객의 취향도 달라지죠. 저희가 클래식한 옷을 만들어도 지금 20대 친구들이 생각하는 클래식의 느낌과 같은가를 고민해야 해요. 고여 있으면 안 되니까 자꾸 밖으로 나가 리프레시하고, 멋진 작업을 보며 감탄도 하고요. 저와 팀원들이 그런 정보를 계속 공유하고 좋은 걸 같이 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일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요.
탐베레가 추구하는 소재와 디테일, 공정을 보면, 단순히 아름다운 옷이라는 목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체적인 기준이 있을 거 같아요. ‘이 정도는 부족해. 그래, 이 정도면 됐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지연 기본 티도 쉽고 평범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작은 디테일을 더해요. 디자인할 때 ‘보이지 않는 곳까지 집중해서 아쉬운 부분 없는 옷을 만들자’가 목표예요. 이번 시즌 안감의 나염도 멀리서 보면 회색이지만 자세히 보면 새가 안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어 요. 일반 사람들이 못 느끼는 작은 부분에도 느낌과 분위기를 담으려 노력해요. 보이지 않지만 소매 밑이 앞과 뒤 높이를 다르게 해서 입었을 때 라인을 살리려고 하고요. 공장에서는 꼭 이렇게 해야 하냐, 힘들다고 하셔도 그것이 저희가 추구하는 부분이라 놓을 수 없죠. 그렇게 해야 탐베레다운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손발을 맞춘 지 오래되어 공장 샘플 실장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작업반장님, 패턴실에서도 함께 고민해 주시죠. 힘들지만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해 다 같이 애쓰는 그 순간들이 정말 좋아요.
윤희 탐베레 기본 반팔 티셔츠를 아이에게 입혀보면 절개가 많이 들어간 걸 느껴요. 이어 붙이면 하나의 판이 되는 거니까 그냥 한 판으로 짜도 되는 걸 많이 자르고 다시 붙여서 만든 거죠.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진 않지만 입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차이가 있어요. 팔을 들어 올리고 내릴 때 느낌이 확실히 달라요.
혜민 봉제할 때 더 편하고 쉬운 원단이 있지만 탐베레는 소재를 한정하지 않아요. 다루기 까다로워 아동복에서 많이 안 쓰는 소재들을 선택해서 탐베레 고유의 분위기와 감성을 지키려 노력해요.
탐베레가 고객에게 전해지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요?
지연 모든 과정에 애를 쓰지만 고객의 손에 전달되는 순간 설렘을 주고 싶어요. 하나의 아이디어에 아트 작업이 더해지고, 상상했던 장면이 옷으로 표현되어서, 고객이 옷을 받으셨을 때 그 감정이 고스란히 닿으면 좋겠어요.
윤희 포장에도 오감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해요. 다른 브랜드들은 비닐 포장으로 마무리한다면 실장님은 급한 상황에도 어울리는 원단을 구해오셔서 끈을 이렇게 달지, 저렇게 달지 고민하면서 포장하시죠.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가 입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탐베레를 마주할 때마다 온화하고 유연한 팀 워크가 인상적이에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시간을 다투는 순간도 많을 텐데요.
지연 옷을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니까 동료들과 즐겁게 해내고 싶어요. 혜민 디자이너가 옷의 공정을 꼼꼼히 살펴 완성도와 핏을 잘 구현해 낼 거라 믿어요. 실험적인 시도를 제안해도 핵심을 잘 파악해서 제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어 내거든요. 옷이 만들어지면 윤희 팀장이 말간 옷 위로 아트 요소를 더해요. 만약 팀장님이 스티치 하나만 그려 넣었다면 그게 가장 예뻐서 그런 거라는 걸 알죠.
윤희 탐베레가 생기기 전부터 우트 내 다른 브랜드에서 실장님과 함께 일해왔어요. 실장님은 해외 출장을 갔다 오시면 참고 할 만 한 제품을 사 와서 ‘이건 이 부분 때문에 참고하려고 샀고, 이건 소재가 너무 좋아. 이건 색감이 멋져.’ 설명해 주시거든요. 실장 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아트 작업에서 실장님이 더하거나 빼고 싶어 하실 때는 제가 시뮬레이션을 보여드려요. 그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더니 이제 별 하나를 그려도 좋다 해주세요.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어요. 늘 잘 한다고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