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40 WALKING LIGHTLY

TRACING HOME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Hae Ran


라이크라이크홈 손명희에게 집은 하나의 길이다. 창밖으로 계절이 흘러가고, 사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감각을 깨운다. 집을 유영하는 습관은 유년의 집에서 비롯되었다. 매일 아침 빵을 굽던 엄마, 한 달에 한 번 대소동이 

벌어지던 집, 누군가의 집에 다녀온 날이면 꼭 그 부엌을 그리던 어린 명희. 그 걸음은 지금, 한 아이의 세계로 

이어진다.

계절을 품은 집에서

"저는 집을 놓아버리면, ‘잘’ 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내면이 단단하고 속이 꽉 차 있어야 외부에서 일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사진으로만 엿보던 공간에 직접 들어와 보니,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요. 실장님과 이 집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라이크라이크홈 인테리어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손명희입니다. 가족과 함께 성북동 타운하우스에서 살고 있어요.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성북동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죠. 이 동네만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았거든요. 자연과 가깝고 차 없이 산책할 수 있는 환경이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이 단지는 아이에게 

썩 적합하진 않아요. 또래 친구도 거의 없고 이웃과의 교류도 많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저는 이곳이 주는 생활의 리듬이 좋아요.

식탁 위의 꽃, 창밖의 빛, 공기의 온도까지, 이 집은 계절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곳 같아요.

맞아요. 우리 집은 1, 2층 모두 테라스가 있는 구조라 창밖으로 나무가 보여요.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엔 녹음이 짙어지고, 가을엔 단풍이 물들고, 겨울엔 눈이 소복하게 쌓이죠. 사계절이 집 안으로 스며드는 거예요. 예전

아파트에선 창밖이 온통 하늘뿐이었어요. 그래서 거실 벽에 그림을 걸어 계절을 대신했는데, 지금은 창밖 

풍경이 작품 같아서 내부를 바꿀 필요가 없더라고요. 벽에 걸어두던 그림도 내려놓고, 대신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요. 예전엔 구조나 가구를 자주 바꿨지만, 여기선 거의 손대지 않아요.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각은 뭐예요?

빛이요. 집에서 빛을 대신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여기는 남향이라 아침 7시부터 햇살이 들지만, 앞동과 옆집 구조물 때문에 오후 1~2시면 해가 막혀요. 햇살이 스치면 어떤 물건도 온기를 띠며 작품처럼 보이죠. 그래서 빛의 시간과 각도에 맞춰 물건과 식물을 배치하고, 커튼도 달리 걸어요.

집에서 오래 머무는 자리는 어디인가요?

이 식탁이요. 거실과 주방의 경계가 없는 구조라 여기서 TV도 보고 바깥도 바라봐요. 빛도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죠.

어떤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지 궁금해요.

요즘은 6시 반쯤 눈이 떠지는데, 커튼을 열고 햇살을 들이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이 집이 경사로에 위치해 있어요. 차가 올라올 때 집이 잘 보이는 구조라 저녁엔 커튼을 급히 치고, 아침이 되면 환기하고 바깥 공기를 들여요.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 마시는 커피 한잔과 고요한 시간이 제일 소중해요. 저녁에도 이 자리에 앉아서 하루를 마무리해요.

공간을 채워갈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뭐예요?

저는 경험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해요. 기억하든 못하든, 경험은 몸에 스며들어 결국 선택의 기준이 되거든요. 이 집에서도 만족스러운 장면을 만들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이전 집에서는 LC 시리즈 가구를 ‘평생 가져갈 소장품’이라 여겼지만, 이 집과는 맞지 않았죠. 토고 소파도 시도했는데, 너무 낮고 불편했어요. 결국 지금의 소파로 바꾸고 반년 넘게 유지 중인데, 저에겐 큰 변화예요. 이곳에 오면서 저 자신도 새롭게 발견했거든요.

테라스에서 식물을 기르네요.

방울토마토, 허브, 상추, 작두콩 같은 걸 키워요. 어릴 때 시골 할머니 댁에서 계절마다 농작물을 보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계절이 식탁 위에 오르는 게 당연했죠. 지금도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정원 팁을 자주 얻어요.

바쁠수록 집이 가장 놓치기 쉬운 공간이기도 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저는 집을 놓아버리면, ‘잘’ 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내면이 단단하고 속이 꽉 차 있어야 외부에서 일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제가 일하는 공간은 늘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고 거친 과정을 거쳐야 하죠. 좋은 공간이나 영감을 주는 장면을 마주하게 되면, 집에 돌아와서 오래 곱씹고, 내 공간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지를 깊이 고민해요. 요즘은 자극도 선별하려고 해요. 정말 도움이 되는 자극만 받아들이고 싶어요. 외부 감흥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집 안에서 정리되고 회복되며 나한테 스며드는 시간이 필요해요. 집은 그런 시간을 담는 그릇이자, 다시 살아갈 에너지를 채우는 장소예요. 아무리 바빠도 그 중심을 놓치지 않으려 해요. 어머니도 워킹맘이셨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집을 새롭게 바꾸셨어요. ‘이 집에 누가 사는지’를 다시 되새기듯이요. 그 습관이 저한테도 남아 있어요.

대화 속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자주 나오네요. 자라온 환경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일 년에 네 번쯤은 집 안에서 작은 ‘대소동’이 벌어졌어요. 가구 배치를 바꾸고, 커튼이나 패브릭, 쿠션, 매트 같은 것들도 전부 교체했죠. 그날은 저희 삼 남매에게는 작은 축제 같은 날이었어요. 저녁이면 짜장면을 시켜 먹거나 동네 돈가스집에서 외식을 했고, 설거지나 정리 당번은 가위바위보로 정했어요. 또, 저희 집은 “하지 마.”보다 “실컷 해봐.”가 기본이었어요.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겠다고 하면 그냥 입게 두셨고, 팽이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같은 것도 “여자라고 못할 게 뭐 있냐”며 다 해보라고 하셨죠. 하고 싶은 건 뭐든, 충분히 경험해보게 해주셨어요.

실패와 호기심, 자유를 자연스럽게 가르쳐주신 듯해요

어머니가 호기심과 열정이 많은 분이에요. 지방 도시에 살다 보니, 서울처럼 큰 시장이 열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일본이나 미국 제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을 즐겨찾곤 했어요. 가끔 지인들 공간을 방문한 뒤 “우리 딸이 보면 좋아하겠다”며 저를 다시 데려가기도 하셨고요. 특별한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그 감각을 저와 나누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주공아파트에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때는 소파와 장롱 같은 중요한 가구를 저한테 고르라고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내 안목을 믿어주는구나’ 하는 신뢰가 크게 다가왔어요. 어머니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마음을 전하는 분이에요. 퇴직 후 재봉틀로 가방이나 모자를 만들다가, 어느 날엔 소창 수건을 만들어 편지와 함께 주셨어요. 보통은 두세 겹으로 만드는 수건을 네 겹으로 곱게 접어 만든 것이었죠. 처음엔 뻣뻣하고 누렇지만, 쓸수록 부드럽고 하얘지는 소창의 성질을 빗대어 “30대에는 많이 부딪히고 힘들겠지만, 그 시간이 너의 각진 부분을 부드럽게 만들어줄 거야. 유연하게 삶을 살아가는 너의 모습이 기대돼.”라는 말을 덧붙이셨어요.

어릴 적부터 뭔가 만들고 가꾸는 걸 좋아했나 봐요.

맞아요. 유치원 다닐 때부터 다음 날 입을 옷을 전날 밤 바닥에 ‘풀세팅’해두고 자던 아이였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액세서리까지 한 치도 빠뜨리지 않았고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고모의 모습을 따라 하다가, 방 안을 태운 일도 있었어요. (웃음)

취향이 또렷한 어린이였네요.

그림 그리기도 참 좋아했어요. 특히 집에 대한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 어머니 말로는 어디를 다녀오면 꼭 그 집의 ‘부엌’을 그렸다고 하셨어요. 네 살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고, 부모님이 소질을 알아봐 주셔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는 입시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자연스럽게 대학도 미술 전공으로 진학했죠. 그런데 순수미술은 제 길이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어요. 작가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판매하는 과정이 저에겐 너무 느리고, 비생산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때 미술관 인턴을 하면서 큐레이터라는 직업도 경험해봤는데, 그 루틴도 제겐 너무 지루했어요.


그 후에는 어떤 길을 걷게 되었나요?

파티셰와 푸드 스타일리스트에 관심이 생겼어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자주 봤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엄마가 베이킹을 배우기 시작하셨는데, 그날그날 다른 빵이 식탁 위에 올라왔어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땐 ‘오늘은 무슨 빵이 기다릴까.’ 기대하면서 집에 왔죠. 그런 집이 저한텐 당연했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벽에 부딪힌 게, 저는 요리를 보기만 했지 해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결혼하면 많이 하게 된다며 엄마가 일부러 못 하게 하셨거든요. 어릴 적부터 엄마 곁에서 요리를 배워온 친구들은 요리를 보면 어떻게 맛을 내는지 아는데, 저는 그렇지 못해 레시피대로 해야만 했죠. 그래서 요리보다는 세팅에 더 흥미를 느껴 푸드 스타일링 어시스턴트로 일했어요.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많았겠어요.

그럼요.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진입 장벽이 높았어요. 유학파나 집안의 지지가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20대에 지방에서 올라와 아무 연고 없이 시작했어요. 그래서 내내 무력함을 느꼈고, 아등바등했어요. 캐나다로 요리 수업을 받으러 갔고, 돌아와선 레스토랑에서 직접 일도 해봤어요. 스프부터 디저트까지 모든 과정을 제대로 경험해야 자세와 태도를 갖춰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칼과 불이 있는 공간이니까 조금만 부주의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굉장히 엄격해요. 그런 경험들이 제 몸에 체화되었고,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노련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어요. 한번은 부모님이 제가 일하던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오셨는데, 살림 한 번 안 시켰던 자식이 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스테이크를 서빙하고 있는 걸보고 충격을 받으셨어요. 마음이 너무 아파 일주일은 우셨대요. 이후 요리 잡지사 마케팅 부서에 들어갔는데, 워라밸이라는 게 아예 없었어요. 그런데도 틈만 나면 고속터미널, 뉴코아 아울렛, 모던하우스 같은 데를 돌아다니며 리빙 관련 제품을 유심히 살폈어요. 시장 조사를 한다는 핑계였지만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회사에서 기업 신제품이 들어오면 촬영을 해야 했는데, 소품을 직접 챙겨 갔어요. 좋아서 모으고, 또 제가 원하는 그림을 연출하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죠. 나중엔 내부 스타일리스트들도 저한테 소품을 빌릴 정도였어요.

그러면서 리빙 스타일링도 시작하게 된 거예요?

편집장님이 제가 스타일링을 좋아하는 걸 아시고 입사해 보라고 권유해 주셔서 리빙 스타일링 회사로 옮겼어요. 하지만 그곳도 쉽진 않았어요. 주 6일에서 주 5일로 바뀌어 가던 시절이었는데 ‘네 시간은 네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일했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지인이 “인테리어도 해볼 수 있냐?”고 물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인테리어 현장에 뛰어들었죠.

그게 ‘라이크라이크홈’의 시작인가요?

맞아요. 처음엔 상업 공간이었지만, 모든 공간은 결국 ‘내가 머무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홈’을 붙였어요. 그때는 새벽 7시에 출근해서 작업자들과 똑같이 현장에서 일하고, 오후 5시에 돌아오면 디자인 서칭과 다음 날 업무 준비를 했어요. 자연스럽게 사업자도 내게 됐죠. 사실 ‘독립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어요. 현장에서 부지런히 배우며 7년간 혼자 운영했어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는데, 힘든 시기를 버틴 동력은 뭘까요?

그저 막연히, 푸드 스타일리스트 1세대 대가분들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죠. 박선영, 노영희, 방배동의 더그린테이블 김윤정 푸드스타일리스트 등이 제 롤모델이었고요. 방법이나 루트는 잘 몰랐지만, ‘나도 저 정도는 돼야지.’라는 생각을 늘 했어요. 엄마가 항상 그러셨어요. “목표가 있다면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일단 ‘내가 저렇게 될 거야.’라고 늘 상상해. 끝까지는 못 가더라도 어느 정도는 닮아가게 될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리고 저를 그런 사람처럼 대해주셨거든요. 그런 상상은 결국 지금 제가 있는 공간으로도 이어진 것 같아요.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오래전부터 막연히 그려왔던 모습이에요. 고즈넉한 환경 속에서 일하며 사는 나를 떠올렸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달려온 시간 속에서,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있다면요?

결국은 가족이에요. 정말 힘들고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아빠는 “그만두고 내려와라.” 하셨죠. 그러면 오히려 ‘내가 해내고 내려갈 거야.’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힘들 때마다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안정감이 있었죠. 지금의 제 감각은 유년 시절의 경험 덕분이에요.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몸에 배어 있어요. 정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자산이죠. 저희 삼 남매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각자 대학으로 흩어졌지만, 모두 자라온 환경과 비슷한 분위기의 공간에서 살아야 안정감을 느꼈어요. 신기하게도, 그런 집이 아니면 쉽게 우울해졌어요. 다들 집 꾸미는 데 관심이 많았고, 익숙한 환경을 스스로 재현하려고 했어요.

걸으며 자라는 삶 

"아이가 17개월 때부터 걸음을 떼고 산책을 자주 다녔는데, 늘 손에 돌멩이나 도토리를 쥐고 오곤 했어요. ‘얼마나 신기했을까?’ 싶어서 저도 그 시선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성북동은 산책로가 많은 동네인데, 잘 거니는 편이에요?

요즘은 걷기보다 자전거를 타요. 예전에는 자연이 그리워 나섰는데, 이제는 집 가까이에 자연이 있다 보니 동네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저녁이 되면 몸이 근질근질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밤 9시쯤 큰길을 따라 걷곤 해요. 맛집도 많은 동네라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요.

걷는 시간엔 어떤 생각을 하나요?

예전엔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와 대화하느라 머릿속이 분주했어요. 막힌 생각이 뚫리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죠. 요즘은 오히려 생각을 흘려보내는 시간이에요. 감정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산책은 그것들을 정화해 줘요. 걷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어요. 심장이 뛰고 몸이 순환되면서요.

아침과 저녁 산책의 차이는요?

주말엔 아침에 걸어요. 이른 시간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고, 계절의 변화도 더 뚜렷하게 느껴져요. 저녁엔 생각을 비우고 싶을 때 나가요. 걷고 싶은 날에만 걷는 편이에요. 산책을 루틴처럼 정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될 때가 있거든요. ‘오늘 걷기 좋은 날씨다’ 싶을 때, 자연스럽게 나가는 게 좋아요.

산책 외에 일상의 리듬이나 습관이 궁금해요.

일요일엔 늘 패브릭을 바꿔요. 일주일을 마무리하면서 분위기도 환기되고요. 또 하나는 밤에 보리차를 끓여 식혀 두는 일이에요. 작년에 크게 아프고 나서부터는 순환과 소화에 더 신경 쓰고 있어요. 운동도 자이로토닉으로 바꿨어요. 근육을 만드는 게 아니라 회복을 위한 운동이에요.


삶의 원동력이 가족에게서 온다고 했는데요, 엄마와 아내로서 살아가는 일상은 어떤가요?

안타깝게도 모든 역할을 완벽히 해내진 못해요. 아이가 어릴 땐 아이를 재운 뒤에야 일을 시작해 늘 잠이 부족했죠. 하지만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 얼굴만 보면 충전이 됐어요. 밖에서는 늘 긴장된 태세로 일하지만, 아이는 무해한 존재잖아요. 물리적 시간보다도 질적인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대화법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아 SNS나 책, 유튜브 등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어요. 예전엔 “오늘 어땠어?”, “무슨 일 있었어?” 하고 물었는데, 그런 질문이 오히려 대화를 막을 수도 있더라고요.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아이가 스스로 이야기를 꺼내요. 말이 많지 않아도,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위안이 돼요.

부모가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예전엔 일할 때 통찰력과 추진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말과 마음이 많이 부드러워졌어요. 성급한 말과 행동이 결국 아이에게 되돌아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한번은 같은 아파트에 사시던 어르신이 지하 주차장에서 담배를 계속 피우셨는데, 끝내 참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아이 유치원 셔틀버스 운전기사셨더라고요. 그 순간 정말 아찔했어요. 만약 제가 감정적으로 대응해 언쟁을 벌였다면 아이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갔을 수도 있잖아요. 그 뒤로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배웠어요.

육아 방식도 변화가 있었나요?

초보 엄마 시절엔 ‘좋은 걸 다 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시켰어요. 시부모님께 부탁드리는 처지에 학원도, 스케줄도 복잡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힘들어하는 걸 느꼈고, 초등학교 진학하면서 많이 정리했어요. 영어 학원을 그만두는 건 쉽지 않았지만요. 그 결정이 아이를 더 주도적으로 만들더라고요. 이제는 오히려 아이가 필요한 걸 먼저 제안해요. 학원 친구 때문에 집중이 안 되면 대안을 직접 찾아오기도 해요. 그렇게 주체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학습에서 내가 예민하거나 먼저 나아갈 필요가 없구나, 얘가 필요한 걸 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어요. 예전엔 숙제를 미루다 실랑이가 잦았는데, 요즘은 ‘놀려면 미리 해야 한다.’며 먼저 계획을 세워요. 스스로 정한 시간에 움직이는 모습이 참 대견해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얻는 영감도 많을 것 같아요.

아이가 없었다면 집이 지금처럼 자연스럽진 않았을 거예요. 아이를 키우며 이유식 그릇에 꽂힌 스푼 하나조차 아름답더라고요. 이전엔 모든 걸 정돈된 세팅으로 유지하려 했지만, 지금은 흐트러진 수건조차 일상의 한 풍경으로 느껴져요. 예전엔 인테리어가 잘된 카페나 매장, 갤러리 건물 안의 멋진 것들만 찾아다니며 관심을 가졌는데, 아이 덕분에 자연으로 시선이 옮겨졌고요. 아이가 17개월 때부터 걸음을 떼고 산책을 자주 다녔는데, 늘 손에 돌멩이나 도토리를 쥐고 오곤 했어요. ‘얼마나 신기했을까?’ 싶어서 저도 그 시선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그런 자연물은 절대 버리지 않고 눈에 잘 띄는 트레이 위에 올려두고 소중히 여겨요. 세원이가 그린 그림도 좋아해서 냉장고에 붙여두곤 했는데, 한번은 떨어졌는지, 청소를 도와주시는 분이 버리셨더라고요. 제가 가장 아끼던 그림이었는데, 너무 속상했어요. 세원이는 저랑 닮은 점이 참 많아요.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이었고 제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라 소리에 민감한 편인데, 아들도 그래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제가 자주 듣던 음악 장르를 지금도 좋다고 말해요. 물건을 고를 때도 제 마음속 생각과 같은 걸 집어서 신기해요. 그럴 때면 ‘이 아이는 내 분신 같구나.’ 싶어요.

부모님에게 배운 대로 아이의 취향을 존중해주려 하나요?

아이가 하교 후 시댁에서 저녁까지 먹는 날이 많아 숙제할 책상이 필요했어요. 책상 고를 때 아이에게 선택권을 줬죠. 세원이는 취향이 확고해요. 버튼으로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책상을 원하고, 의자도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어요. 작년 뉴욕 여행에서도 그랬어요. 기념품 가게에서 노란색 자동차를 골랐는데, 제가 “뉴욕은 옐로 택시지.”라고 말했더니 삐지더라고요. 그때 옆에 있던 엄마랑 여동생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걸 골랐는데 그냥 사주지 그랬어?” 하는 거예요. 사실 예전엔 제 마음에 안 들면 사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그 순간 하고 싶은 걸 막으면 나중에 더 크게 튀어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크게 문제되지 않으면 원하는 걸 존중해요. 최근엔 KTX 열차 굿즈를 마음껏 고르게 했어요.

요즘 아이가 빠져 있는 건 무엇인가요?

지하철 여행이에요. 할아버지랑 지도를 보면서 여기저기 다니는데, 최근에는 천안까지도 다녀왔어요. 게임도 친구들이랑 신나게 하고요. 주중에는 할머니 댁에서 욕구를 많이 조절하며 지내니까, 주말만큼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게 두고 있어요. 제 눈앞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며 자연스럽게 즐기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요리도 꾸준히 좋아해서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한비랑 엄마랑 우리 요리》 책을 보며 요리하곤 해요. 꽃시장에서 꽃을 고르고 정원에 물을 주기도 하고, 피아노도 같은 선생님께 배우고 있어요. 주말에는 게임만 빼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해요..

‘엄마로 사는 일’이 실장님의 삶에 남긴 궤적이 참 깊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그래요. 아이 덕분에 저도 많이 자랐어요. 미숙하고 서툴렀던 제 인간성도 많이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욕구도 생겼어요. 공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고요. 옷걸이 하나를 걸더라도 아이 높이에 맞아야 옷이나 가방을 스스로 걸 수 있겠구나 싶었고, 아이 시선에서 인테리어를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가족의 집을 맡으면 훨씬 더 입체적으로 공간을 바라보게 돼요.


지금 가장 관심 있는 건 무엇인가요?

자연이에요. 바깥 풍경일 수도 있지만, 자연 소재를 집 안에 끌어들이는 것, 생활의 리듬이나 온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게 중요해졌어요. 곧 집 근처로 사무실을 옮기는데, 창밖에 나무가 많고 외부 데크도 있어요. 그곳에서 자재, 가구, 디스플레이가 어떻게 자연과 어우러질 수 있을지 다양한 실험을 해보려 해요.

그 실험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나요?

바닥재나 벽 도장처럼 꼭 필요한 부분만 시공하고, 나머지는 디자인 가구와 소품으로 연출하려 해요. 예전에 한옥 공사 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거든요. 스테이용으로 기대하고 들어갔지만 전철 소음과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떠났어요. 이번 공간은 상업용이라 ‘원상 복구’ 조건이 명확해, 나중에 철거하지 않아도 되는 도장·바닥재·전기 작업만 하고, 빈티지 가구와 소품으로 채우려 합니다. ‘내 돈 들여도 아깝지 않게’라는 기준이 생긴 셈이에요.


요즘의 디자인 고민은 뭐예요?

인테리어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딜레마예요. 어떤 물건이 좋다고 사용하고 이미지를 올리면 금세 ‘국민 아이템’이 되고, 비슷한 매칭이 이어지죠. 다들 비슷비슷해지니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최근 고객 집 공사 사례는 거의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요. 지금 홈페이지에 있는 사례들도 4~5년 전 집이거나, 2년 전 사무실이에요. 결국 제가 향하는 방향은 수집품, 희귀품, 작가의 기물 같은 유니크한 것들이에요. 기성품엔 흥미가 줄었고, 특히 ‘소재’를 많이 탐구해요. 돌을 어느 정도 면적에 쓸지, 나무는 어떤 종류가 좋을지, 나무와 돌, 금속 같은 자재를 어떤 식으로 배치하면 새집인데도 새것 같지 않은 공간이 될지를 고민하죠. 모던한 감각을 살리면서도,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어떻게 나답게 다르게 풀어낼 수 있을지, 내 취향에 대한 리서치와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해요. 그 과정에서 이미지를 눈으로 많이 담아두고, 적용할 수 있는 사례가 생기면 시장 조사를 거쳐 풀어내요. 문제는 자재가 다양해질수록 예산도 높아진다는 점이에요. 모든 공간에 적용하긴 어려워서 전세 형태로 집을 계속 옮겨 다니며 실험해왔어요. 남의 집에 비싼 자재를 써보는 건 말 그대로 ‘시험’일 뿐이니까요. 실제 테스트를 위해 사무실을 활용하기도 했고요.

직업과 환경이 변하면서 지향하는 삶도 달라졌나요?

집을 다루다 보면 문득, ‘여기에서 몇 년 더 살다가 다음엔 저기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4~6년에 한 번씩 다양한 주거 형태를 직접 겪어왔어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고객의 삶에 더 가까이 닿기 위한 근거를 쌓는 과정이었죠. 그런데 지금 집에 살아보니 ‘이 순간을 더 오래 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다음 집은 이사 없이 오래 머물며 가족의 이야기가 천천히 쌓이는 공간이었으면 해요. 시간을 옮겨 다니는 대신, 한자리에 천천히 뿌리내리고, 누리고, 기록하는 집. 그 안에서 세원이와 남편,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제 모습을 함께 바라보며 살고 싶어요.

지금 바라는 모습은 어떤가요?

SNS 속 제 모습은 아마 한적하고 여유롭게만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에요. 컨펌 하나만 건너뛰어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늘 곤두서 있어야 하죠. ‘언제까지 이렇게 치열하게 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 가장 바라는 건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이에요. 작년에 이사하고 정신없이 지내느라, 바비큐를 딱 한 번밖에 못했더라고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걸 거의 누리지 못한 거예요. 앞으로는 여름 두 달만이라도 꼭 휴가처럼 쉬고 싶어요.

그 바람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행복을 회복하는 과정 같기도 하네요.

맞아요. 유년 시절의 행복한 공간과 온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요. 세원이에게도 그런 경험을 물려주고 싶어요.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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