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38 MY ROLE MODEL

BORN INTO MUSIC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이승재 


김윤아의 음악은 내게 청춘의 파도 같았다. 불안하고 외로워 자꾸만 작아지는 날에는 어디선가 그의 음악이 넘실대듯 밀려왔다. 엄마가 되어 또 한 번 폭풍을 만났다. 어느 때보다 내가 필요한 존재가 있지만 그래서 더 나를 잃어가는 것만 같고, 갈망에 짓눌려 마음은 삐걱거렸다.


“때로 너의 꿈은 가장 무서운 거울이라 초라한 널 건조하게 비추지
너의 꿈은 때로 마지막 기대어 울 곳. 가진 것 없는 너를 안아주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이 포말이 되어 먼바다로 갔다. 하염없이 부유하다 바다의 끝에서 옅은 희망과 다짐을 건져 올린다. 김윤아는 폭풍 한가운데서, 지금을 말하기 위해 노래를 만든다. 그의 음악은 삶과 함께 매일 새로 태어난다.

노래가 함께한 순간만큼은 아름다웠어

"작년하고 올해는 다른 시간이고 우리는 그동안 다른 사람이 됐잖아요. 그러면 지금의 노래를 해야죠.”


만나서 반가워요. 청춘을 함께한 가수와 이야기 나누게 되어 기쁘고 설레어요.

반갑습니다. 김윤아입니다.

건강한 어른을 보면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 호기심이 일어요.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가볼까요? 무엇을 좋아하는 어린이였어요?

언제부터인지 딱 기억나지 않는 순간부터 책을 읽었어요. 어릴 때 가정에 말도 안 되는 규칙이 많았거든요. TV 시청은 뉴스와 다큐멘터리 명작 영화들 중에 부모가 정한 거만 볼 수 있었고, 음악도 집에 있는 앨범만 들을 수 있어서 클래식 음악만 듣는 게 원칙이었어요. 그래서 집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신문도 많이 읽었고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소재를 일찍 접한 셈이죠. 그 외에는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아요. 벌레 잡으러 다닌 거랑 책을 아주 좋아한 거 정도만 생각나요. 인간의 뇌가 신기하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지우는 경향이 있거든요. 아주 친한 친구도 없었어요. 친구는 학교 가면 있는 존재, 쟤도 사람, 나도 사람, 이런 느낌이었어요. 엄격한 가정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탈선행위는 공부 안 하고 책 보고 그림 그리고 시 쓰고 노래 듣는 거였어요. 저한테는 생명의 동아줄 같은 존재였죠.

곁에 노래도 있었네요.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호흡을 길게 뱉는 행동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았거든요. 노래를 잘한다는 자각 없이 그 행위 자체를 즐겼어요. 주변에서는 저를 노래 잘하는 아이로 인식했는지 초등학생 때는 태권도 학원 관장님이 불러다 노래를 시키기도 하셨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동요를 만들고, 중학교 땐 합창부도 했어요. 처음 해외 팝 음악을 접한 때를 잊지 못해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인데요. 친구들이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에 나온 ‘올해 히트 팝송 100곡’이 좋다고 하는데 정말 궁금한 거예요. 집에 아무도 없는 날, 조그만 아날로그 라디오를 가지고 구석에 숨어서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춰봤어요. 그때 한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아주 좋은 거예요.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이었거든요. 쇼킹한 경험이었어요. 빌리 조엘과 퀸을 좋아하며 저의 해외 음악 인생이 시작됐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죠. 그때부터는 더 몰래 찾아 듣고, 고등학생 때는 CD 플레이어를 가지게 되면서 명절 때 세뱃돈을 받으면 CD를 사러 갔어요.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클래식 앨범과 팝 앨범을 거의 반반 비율로 샀고요. 돈이 없으니까 음반점에 가서 작곡가랑 표지를 보면서 그 음악이 어떨지 상상하면서 신중하게 사 모았죠.

그때부터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나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순간이 몇 번 있어요. 하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박지현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지금도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크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다가 정말 착하고 반 아이들이 다 좋아하는 친구였어요. 어느 날 이 친구 아버지가 미국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이 한국을 떠나게 된 거예요. 반 친구들이 너무 섭섭해서 지현이에게 뭘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음악실에 모여서 유행가들을 다 같이 불러 녹음해 주기로 했어요. 제가 ‘지현에게’라는 노래를 썼고, 친구들과 함께 불러서 녹음을 했죠. 지현이 앞에서 불러줬을 때 지현이 반응과 친구들이 그 노래를 부르던 아름다운 순간이 아직도 각인돼 있어요. 나의 비루한 취미 생활이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구나, 이렇게 눈부신 찰나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경험이 저를 노래를 만드는 사람으로 이끈 거 같아요. 또 하나는 연극부 생활이에요. 1학년들은 스태프로 연극을 서포트해야 하니, 조명을 다루고 음향을 살피는 걸 재밌게 했고 2학년이 되어 메인으로 연극을 했어요. 그때 국어 선생님이 연극부 고문 선생님이었는데 ‘당황하는 별들’이라는 뮤지컬 작품을 무대에 올리자고 하셔서 악보를 구해야 했어요. 하지만 정보가 부족해서 3분의 1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나머지는 대본에 있는 가사를 토대로 제가 곡을 만들었죠. 솔로 곡도 있었고요.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관객 앞에서 극을 책임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날이 처음 무대에 오른 날인가요?

어떤 무대를 처음이라고 봐야 될지 모르겠는데, 데뷔 무대는 축가예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아드님 결혼 축가를 부탁하셨거든요. 지금도 노래하는 무대 중에 축가가 제일 압박감이 커요. 내 노래를 들어달라는 무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잖아요. 다양한 연령층의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를 선보여야 하고,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기도 하죠.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모르는 친척들 앞에서 부른 그 축하 공연이 굉장히 쉽지 않은 데뷔 무대였어요. 또 분위기로 기억에 남는 첫 순간도 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수업 끝나고 자율학습을 하는 중이었어요. 정말 조용하고 누가 연필 떨어뜨려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도서관이었는데 학생주임 선생님이 아이들 공부 잘하고 있나 순찰을 돌고 계셨어요.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와 공부를 딱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김윤아 일어나 봐. 노래 하나 하고 공부해.” 하시는 거예요. 그때 로미오와 줄리엣의 ‘A Time for Us’를 불렀는데, 관객이 숨죽인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어요. 안 그래도 조용한 도서관인데 숨이 한층 더 낮아지는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나요. 역시 나는 노래를 잘해 같은 쾌감이 아니고 기적 같았어요. 이 사람들이 나랑 같은 호흡을 하고 있다는 동질감이 느껴졌어요. 지금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천 명, 이천 명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랑 같은 호흡을 해요. 정말 경이로워요.

그 순간들이 음악을 계속하게 이끌었던 걸까요?

굉장히 감사한 순간이긴 한데요.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재미있어서예요.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도 가장 즐겁기 때문이거든요. 멜로디와 가사의 결을 맞추고 레코딩하는 과정이 정말 최고의 놀이예요. 순간에 몰입해서 열정적으로 펄스를 주고받을 때, 뇌 세포 하나하나가 다 날카롭게 반짝인다고 느끼는 순간을 좋아해요. 제가 만든 노래를 누군가 어떻게 듣는지 생각하기보다 음악을 만들 때 뇌를 압박하는 과정을 즐기는 편이에요.

팍팍한 현실이지만 음악에 많은 의지를 한 거 같아요. 어떤 생각들을 하며 지냈어요?

솔직히 말하면 태어나는 건 내가 선택한 게 아니지만, 마지막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언제나 탈출 버튼을 누를 수 있고, 그러면 다 끝난다고요. 제 바탕에는 항상 그런 생각이 깔려 있었고, 자우림 음악도 그런 배경의 노래가 정말 많아요. 아이를 낳고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 생각을 굉장히 오래 하며 살았어요. 그게 한편으로는 자유를 줬던 것 같아요.


그렇게 노래를 좋아했는데, 음대 진학은 어려웠다고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작곡가를 희망했는데, 선생님들은 성악과를 권유하셨죠. 둘 중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가정에서 극구 반대하셨기 때문에 인문학 전공을 선택했어요. 그 대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밴드를 시작했어요. 과외 선생님이 저보다 네 살 위였는데, 밴드 보컬이었어요. “우리 밴드에 와.”라고 해서 키보드 치고 코러스 하며 밴드에 빠져들었죠. 밴드를 한번 시작하면 나올 수가 없어요. “이 노래 코드 따 와.” 그러면 노래 듣고 만들어 가서 같이 연주하고. 아주 많은 아마추어 밴드를 거쳤어요. 아마추어 밴드는 대학생들끼리 알음알음 팀을 만들어요. ‘베이스 치는 애 소개해 줄게.’ 하거나 서로의 학교에 ‘기타리스트 구함’ 써 붙인다든가 PC통신 시절엔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에서 메탈 동아리, 올드락 동아리 같은 동아리를 결성했어요. 팀을 만들고 6개월 정도 연습해서 공연을 한 번 해요. 다음엔 뭐 할까 할 때쯤이면 한두 명한테 영장이 나와요. 그러면 다시 기타리스트 구함 붙여야 되거든요. 많은 밴드를 거치며 정말 좋은 경험을 했어요. 밴드를 할 때마다 사람들 취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떨 때는 하드락을 다루고, 어떨 때는 팝을 연주하고, 어떨 때는 메탈 비슷한 걸 만들었죠. 음악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아했는데, 모든 경험이 제 자양분이 되었어요. 대학 시절 공부보다 밴드를 더 열심히 했어요. 아, 제일 열심히 한 건 연애네요(웃음). 그렇게 많은 밴드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자우림 멤버들을 만나게 됐고요.

자우림, 김윤아가 만든 노래는 신기하게도 내가 불안하거나 어려울 때마다 찾아온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어떤 감정, 생각은 말보다 에너지로 더 강하게 전달되잖아요. 해설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 같다고 할까요, 요상하게 신나는 멜로디와 서늘한 가사가 서투른 내 청춘의 배경음악 같았어요.

자우림은 우리 셋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청년이 페르소나예요. 연령은 모르겠고 성별도 없지만 마음속에 폭풍이 이는 청년. 존재의 미약함이나 외로움 같은 걸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에요. 우리는 늘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해요. 누가 뭐 했더라, 같은 이야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 요즘 보는 영화나 전시 같은 이야기를 주로 나누죠. 작년하고 올해는 다른 시간이고 우리는 그동안 다른 사람이 됐잖아요. 그러면 지금의 노래를 해야죠. 현재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해요. 작년에 했던 이야기를 올해 또 한다면 계속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거 같아 지루해요. 물론 지난 시절 영감의 재료나 단어 같은 게 올해 음악에 아이디어가 될 수는 있겠지만 10년 전의 나를 바탕으로 지금의 음반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의 나한테 가득 차 있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펄펄 끓는 청춘의 노래처럼 느껴지나 봐요.

안정을 추구하지 않는 건 꼰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일이기도 해요. 가장 즐거웠던 때, 좋았던 때, 건강하고 행복했던 때, 한창 연애하던 때 모습만 이야기하는 건 좋아 보이지 않아요. 경력도 있고 나이를 먹었다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굉장히 경계하거든요. 태어나는 순간을 우리가 정할 수 없잖아요. 먼저 태어난 것뿐이지 그건 권력이 아니에요. 나이 많은 꼰대가 되지 않는 게 저한텐 굉장히 중요해요. 자우림 멤버들도 마찬가지고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번듯한 어른들이 추구하는 것들에 천착하지 않아요.

아티스트 김윤아가 어둡고 불안한 시기에 듣는 음악이 있나요?

저는 불안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이 누적되면 음악을 거의 못 들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 듣던 바로크 시대 음악을 들으면 좀 괜찮아요.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바로크 시대 음악, 특히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페르콜레시의 ‘비탄의 성모’가 유일하게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에요.

자신의 기분 상태나 생각을 잘 파악하고 컨트롤하는 거 같아요.

‘팬이야’가 그런 경험의 노래예요. 대학교 1학년 때 입시에서 딱 벗어난 첫 여름방학이었어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산처럼 빌려다 놓고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를 봤거든요. 정말 좋은 영화들이 많지만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시리즈 중에 하나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트윈 픽스>예요. 컬트 영화고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스토리인데 그 살인 사건이 단순히 사이코패스나 쾌락살인범이 벌인 일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섞여 있는 영적인 체계와 관련이 있어요. 끔찍하고 기묘한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사건의 한가운데에 데일 쿠퍼라는 FBI 수사관이 있어요. 매일 아침 동네에 있는 카페테리아 같은 데 가서 도넛과 커피를 시켜서 먹고 ‘아, 이 맛이지. 너무 행복해. 난 진짜 행복하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요. 그 사람을 보면서 행복을 처음 배웠어요. 저렇게 끔찍한 일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와중에 마시는 커피 한 모금.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다 이야기하는 행복은 깊이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행복을 자주 누리기 위해서 데일 쿠퍼 흉내를 냈어요. 대학교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학교 도서관에 가려고 깜깜한 새벽에 집을 나서면서도 거울 앞에 앉아서 정성스레 단장했어요. 어릴 때부터 예쁘게 꾸미는 걸 좋아했어요. 집 앞에 심부름 갈 때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가꾸곤 했거든요. 비록 시험 날이고 도서관에 갔다가 시험만 보고 집에 올 거지만 머리를 세팅하고 메이크업을 하면서 거울을 보고 얘기했어요. ‘너 오늘 아주 멋져 예뻐. 오늘 시험 잘 볼 거야.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아마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게 일종의 주문처럼 느껴졌어요. 그다음부터는 종종 ‘잘될 거야.’ 하고 스스로 얘기하게 되었죠.

스스로 거는 주문이네요.

제가 회의론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 말은 힘이 약해요. 물론 그 사람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내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게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해요.

‘꿈’이라는 노래를 듣던 날이 한 장면처럼 남아 있어요. 10대, 20대에도 꿈을 좇았지만 엄마가 되니 또 다른 불안감이 있더라고요. 라디오에서 ‘꿈’을 듣고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 날이 있었어요. 어떻게 만들어진 노래인지 궁금해요.

‘꿈’의 앨범명이 <타인의 고통>이에요. 수전 손택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 앨범을 만들던 시기가 세월호 사건으로 사회가 큰 트라우마를 겪은 후였어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많이 집중하게 됐고, 제가 깊이 공감한 타인의 여러 인생 이야기를 모았어요. 일본 TV 프로그램 중에 <집에 따라가도 될까요?>가 있어요. 새벽무렵 지하철에 가면 술 먹고 막차가 끊겨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에게 ‘집까지 택시비를 내줄 테니까 당신 집에 가서 사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물어요. 거기에 나이지리아에서 일본으로 온 분이 출연했는데, 열심히 일해서 고국에 있는 가족한테 돈을 보내고 있었어요. 사는 집이 정말 손바닥만 하고, 집에 있는 거라고는 조그마한 침대랑 가족사진이 다예요. 근데 이 사람한테도 꿈이 있어요. 꿈은 잠깐 접어놓고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편을 보고 만든 곡이에요.

싱어송라이터 김윤아를 생각하면 새로움, 도전, 모험 같은 단어가 함께 떠올라요. 최근 낸 앨범 <관능소설>도 아주 새로운 실험이었다고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대중음악은 10대, 20대의 달달한 연애, 결혼하기 전 연인 사이 혹은 헤어져서 슬픈 이야기가 많은데, 저는 그게 사랑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깊고 어두운데 어쩔 수 없는 사랑이 예술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소재로 앨범을 만들고 싶었어요. ‘관능소설’ 앨범을 펼쳐 보면 첫 단락이 “나는 중도에 있다”라는 글이 있어요. 3년 전쯤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머릿속에 종이 ‘띵’ 켜지는 것처럼 ‘나는 길 한가운데 있잖아.’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길 한가운데 있다는 건 아무 데나 갈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럼 난 아무 데나 가야지. 내일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를 좀 더 풀어줄 거야.’ 마음먹고, 이탈리아에 갔어요. 새로운 앨범 촬영을 하고 글을 쓰고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바라봤죠. 이미 머릿속에 신곡의 밑그림이 있었지만 가서 방향을 좀 더 단단하게 정했어요. 돌아와서 10개월 정도는 곡 작업에 매진했어요. 4월에 앨범이 나오자마자 공연을 했고, 8월에 한 번 더 콘서트를 열었어요. 이렇게 단기간에 두 번의 콘서트는 하지 않는데 내년부터는 자우림 일정이 가득 차 있어 올해가 너무 애틋하고 소중해요. 8월 공연엔 술을 곁들이는 시도를 했어요. 평소 제 솔로 공연을 맨 정신에 들으라고 하는 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거든요. 실행해 보지 못한 부분인데, 이번에 도전해 만족스러워요.

전작을 뛰어넘는 만족, 예전과 다른 방식을 시도하려 늘 애쓰는 모습이에요. SNS에서 ‘지난 공연, 앨범보다 더 기억에 남는 무대로 만들고 싶다.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 실험해 보고 싶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계속 날갯짓을 하고 싶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저를 비롯해서 자우림 멤버들이 아직도 학생 밴드 같은 느낌이 있어요. 관객이 있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좋은 음악을 만들거든요. 노는 것처럼 음악을 하지만 11집까지 나올 때마다 이전 앨범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게 우리 마음가짐이에요. 팬들보다 우리 기준이 더 엄격할 때가 많아요. 여태까지는 그걸 다 충족해 왔기 때문에 팬들도 그런 점을 좋게 생각해 주시는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고요. 까다로운 자체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들지 않는 것 같아요. 빅히트 곡에 집착하고 성공 공식 같은 걸 잘 분석해서 음악을 만들었다면 따분한 밴드가 되었을 거 같아요. 더 대중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재미없어요. 저는 새로운 걸 하고 싶어요. 내가 재미있는 요소들을 계속 추구했기에 지금까지 할 수 있었죠.

요즘 EP나 싱글 앨범도 많은데, 자우림은 열 곡 이상의 노래를 담은 정규 앨범이 많더라고요.

코로나 시절 팬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만든 앨범과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무조건 정규 앨범을 내려고 해요. 앨범에 노래가 별로 없으면 시시하거든요. 멤버가 셋이나 되는데, 생산성을 더 내야죠. 우리끼리 알아서 하니까 힘들지 않고요. 조금 더 해서 확실히 재미있게 하고 싶어요.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거야

"나이가 들어도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자신을 갈아 넣어서 좋아하는 걸 만들어내는 거요. 내가 여기 있다고 외쳐야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나이에 대한 편견이 자연스레 옅어지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알게 되었는데, <Ruby Sapphire Diamond>가 아이를 낳은 직후의 앨범이더라고요. 당시 앨범을 자주 들으면서도 김윤아의 출산이나 아이 등에는 큰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엄마가 되고 난 지금은 그 음반이 다르게 다가와요. 큰 변화를 겪고 만든 앨범일 테니까요.

아이가 태어나면 작업실에 아기 침대를 놓고 옆에서 일하면 되겠지, 생각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모성 호르몬이 높아지고, 아이를 돌보겠다는 책임감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죠. 곡을 만들 때 기타를 쥐어야 되는데 손목이 너무 아파서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음악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일을 해온 내가 같은 방식으로 노래를 만들었나 봐요. 노랫말과 멜로디는 엄마가 된 내가 바로 반영이 됐다기보다는 6집과 7집 사이의 내가 밀집되어 만들어졌어요. ‘Something Good’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얘기하지만 좋은 일이 결국 오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자우림 음악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요. 제가 엄마가 된 거지 자우림이 엄마가 된 건 아니니까요. 솔로 음반에 여성으로의 나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려고 하죠. 2010년 솔로 3집 앨범인 <315360>에 여성으로서 겪은 사적인 이야기가 많아요. ‘에뜨왈르’는 민재를 생각하며 쓴 곡이고, 한 곡 한 곡 제가 아닌 노래가 없어요.

‘Cat Song’, ‘Summer Garden’을 들으면 생명을 지키고 이별을 두려워하는 모성의 마음이 전해져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공고하게 지배한 가치관이 무너졌다고 했죠?

네. 서른 셋 민재가 태어나자마자 무조건 힘 닿는 대로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아이는 내가 없으면 안 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존재잖아요. 제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이었는데, 아이가 주는 사랑은 조건이 없어요. 그래서 결핍이 많이 채워졌어요. 아이가 나에게 어떤 부분을 치유해 줬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민재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드디어 문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언제나 타투를 하고 싶었지만 어떤 타투를 해도 1년이 지나면 질릴 거 같았거든요. 그걸 커버하려고 다른 타투를 하고, 그거에 또 질리는 일을 반복할 게 눈에 보였죠. 그런 제가 백동백 타투를 했어요. 영원한 무언가가 생겼다는 말이에요. 민재가 저한테는 백동백 같았어요. 꽃잎이 토실한 백동백, 동백이 가득 핀 나무 같은 의미이고, 이 동백은 저한테 영원한 거예요. 저한테 민재가 영원한 존재인 것 이상으로 민재한테 저도 영원한 사람이죠.

극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 거네요. 곁의 아이와 함께하며 일상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요.

더 너그러운 사람, 더 까다로운 사람이 됐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어요. 전에는 낯을 정말 많이 가렸어요. 대학생 때까지는 모르는 사람하고 밥을 못 먹었어요. 모르는 사람하고 회의하는 것도 잘 못했고,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둘만 있는 게 너무 불편하고, 아는 사람하고도 전화하는 걸 싫어했어요. 그런데 민재가 태어나면서 아이가 있는 사람은 다 동지 같은 거예요. 어느 날은 민재를 유아차에 태우고 나갔는데 다른 사람이 아기를 데리고 나온 거예요.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아기 몇 개월이에요?” 묻고 있더라니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민재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는 어린이집 엄마들하고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여덟 가정이 친해져서, 한 팀처럼 놀았어요. 편안하게 일상을 얘기하는 친구들이 생겼죠. 아이들이 성장 시기를 지나면서 난생처음 겪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그 친구들에게 지금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민재 덕분에 새로운 세상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새로움에 도전하고, 나를 갈아 넣어 음악을 만드는 욕구가 아이에게 안정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과 충돌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작업실을 밖에 못 둬요. 앨범 만들 땐 집에서 거의 잠밖에 못 자니까요. 사실 이 집은 넓은 작업실을 위해 존재해요. 작업실은 제 심장이거든요. 물론 집에 작업실이 있으면 “엄마 뭐 해?” 하고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아 흐름이 끊기기도 해요. 지금도 자주 그러고요. 남편이나 다른 어른이 “엄마 일하니까 자주 들어가면 안 돼.” 가르치기도 하고 엄마가 일하는 시간이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줬죠. 제가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밖으로 나와서 아기랑 놀기도 했고요. 선을 정해서 서로 잘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28년 차 가수이자 열일곱 살 민재 엄마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흘러요?

시즌에 따라 다른데 앨범 만들 땐 보통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오전 11시쯤 일어나요. 그사이 민재는 학교에 가고 남편도 출근하죠. 아점을 먹고 일할 준비를 해요. 저는 작업할 때도 편하게 늘어지는 의상은 잘 안 입고, 의식처럼 정돈하고 기분 내고 작업해요. 긴장감이 느껴져야 호흡이 올라오는 것 같거든요. 작업을 시작하면 오후 6시 정도까지 일을 해요. 그런 다음 저녁 준비를 해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잘 준비까지 마친 8시나 9시쯤 다시 작업에 들어가서 새벽 3~4시까지 일하는 거죠.

음악 외에 즐겨 하거나 좋아하는 것도 있어요?

요새는 너무 바빠서 책을 자주 읽지는 못하는데, 배수아 작가님이 쓴 책들을 좋아해요. 배수아 작가님 책을 거의 다 구비해 놨거든요. 《뱀과 물》을 읽고 쇼크를 받았어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굉장히 파괴적인 문장 구간이 있는데, 정말 천재가 아닐까 싶게 감탄해요.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 발레를 배워요. 내 몸과 마음을 챙기는 시간이죠. 10년 정도 했어요. 발레는 조금만 움직여도 힘든데, 그 힘듦이 참 좋아요. 어렵지 않으면 보람이 없어요. 힘들어야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죠. 또 발레라는 장르를 예술로 이해하니까, 그 동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요즘 민재의 관심사는 뭐예요?

어릴 적부터 한결같이 기계를 좋아하는데요. 파일럿이 꿈이라서 항공 시뮬레이터 센터 같은 데 가서 훈련을 받고 컴퓨터도 스스로 조립하고 3D 프린트로 이것저것 만들어요. 제가 워낙 기계를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기계로 같이 놀았어요. 이제는 민재가 저한테 가르쳐줄 정도로 안목이 있고 지식이 많아졌어요. 요새 저희 둘은 카메라에 관심이 많아요. 남편과 셋이 같이 게임도 하고요.

민재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나요?

자기 밥은 스스로 해 먹고, 남한테 신세 안 지고, 좋아하는 일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일상이 행복하다는 뜻이거든요. 행복한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요.

아이한테 물려주고 싶은 부분도 있을까요?

이미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아이는 완벽하니까요. 오히려 제가 민재한테서 뺏어오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한 가지를 굉장히 심도 있게 들여다봐요. 저는 전체를 다 보고 파악하는 스타일이고 민재는 주변보다 딱 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스타일이라 부러워요.

취향, 취미 같은 단어보다 의무, 루틴, 체계라는 어휘로 묻게 되네요. 가족이 정한 의무나 규칙 같은 것도 있는지 궁금해요.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과 옆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작업실 옆에 제 방이 있고, 남편 방은 거실을 지나 있으니 거의 옆집 생활이긴 해요. 그 사이에 민재 방이 있죠. 저녁은 제가 하고 설거지는 남편이 하는 건 규칙처럼 돼 있고, 제가 작업을 하고 있으면 민재나 남편이 되도록 방해하지 않는 거. 앨범 작업이나 콘서트가 끝나면 보상처럼 가족들과 여행을 가서 놀아요. 작년 5월에 유럽에 다녀오고 나서 지금까지 계속 달려왔어요. 지금도 휴일 없이 일하고 있는데, 11월 초에는 스페인에 갈 거예요.

모든 부분에서 흐트러짐이 없고 단단한 모습이에요. 스스로 미숙하다 느낀 순간이 있나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몹시 애써요.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공연 때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니까 공연 4주 전부터는 술 안 먹고 운동을 성실하게 해요. 자학적일 정도로 마감 날짜를 맞춰서 회사에서 이런 아티스트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죠.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녹음 일정을 좀 미루고 싶어도 절대 그렇게 안 해요. 모든 일이 그렇지만 긴 시간 동안 나와 스태프들이 파트너십을 맺고 꾸준히 해야 겨우 되는 일이잖아요. 사실 그것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긴 적도 있는데 차라리 제가 뒤집어쓰는 게 나아요. 만약에 몸이 아프게 됐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인생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웃음)? 친구들하고 술을 먹어야 한다면 장기 스케줄을 보고 시기를 미리 정해서, 일에 영향을 주지 않게 일정을 짜요. 그럼에도 실수를 했고 타인에게 피해를 줬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잊어버려야겠죠. 사람이라 실수할 수 있는 거지, 미숙해서 실수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책해서 내가 끼친 피해가 상쇄된다면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책은 소용없는 일이잖아요.

매거진 주제를 ‘되고 싶은 나’로 설정할 때, 한 덩어리로 갈망하는 이상향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성장하고 싶은 분야를 먼저 정하고, 닮고 싶은 태도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커뮤니케이션, 창의성, 패션 스타일, 건강, 육아 등으로 나누고, 분야별 담고 싶은 사람을 적어보니까 앞으로 살고 싶은 삶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겠더라고요. 제가 김윤아에게 가장 닮고 싶은 건, 자신이 늘 옳다고 생각하는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지양하는 점이에요. ‘꼰대가 되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하나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게 많은 도움이 돼요. 제가 아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고, 제 인생은 좁잖아요. 저는 트위터를 정말 좋아해요. 7백 명 정도 팔로우하고 있는데,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다른 분들의 인생을 보는 일이 큰 공부가 되고 그들의 생각을 읽는 게 영감이 돼요. 오늘 점심에 자두를 먹은 이야기, 우체국에 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나눠주신 이야기,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소중해요. 그분들의 글을 읽으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해요.

김윤아도 누군가에게 닮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주변에 행복을 잘 발견하는 혜준 씨라는 친구가 있어요. 확실한 자기 취향이 있고,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이에요. 굉장히 독립적으로 본인 루틴을 만들어서 싱글 생활을 하는 중이고 무엇보다 유머 감각이 남달라요. 시니컬한 저는 그런 유머 감각을 가질 수 없어요.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우리는 다르잖아요. 그 성향으로 바뀔 순 없으니 지니고 태어나지 못한 건 별로 아쉽지 않아요. 다만 상황에서 본받을 점은 배우고 싶죠. 자신의 가정에 집중해서 자녀를 훌륭하게 뒷받침하면서 커리어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분이 있다면 닮고 싶어요.

아직 못 찾은 거군요.

한국에서 여성으로 음악을 하면서 “롤모델이 있나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아요.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전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계속 공연을 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도전하면서 권위적인 말도 안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요. 해외에도 끝까지 기품 있게 자신의 길을 가는 뮤지션이 남녀를 떠나서 잘 없어요. 오히려 내가 음악을 한 지도 오래됐고, 계속 앨범을 낼 테니,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해요. ‘내가 잘났으니까 할 수 있어.’ 이런 얘기가 아니고 ‘저 사람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미 많은 이들의 롤모델인걸요.

그것도 정말 부담스러워요. ‘쟤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어.’의 쟤만 되어도 기쁘고 충분하죠. 한국 문화가 에이지즘이 심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른만 넘어도 대중문화계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해요.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 분야가 많아요.

어떻게 노력하면 좋을까요?

나이가 들어도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자신을 갈아 넣어서 좋아하는 걸 만들어내는 거요. 내가 여기 있다고 외쳐야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나이에 대한 편견이 자연스레 옅어지지 않을까요?

멈추지 않고 계속 도전해야겠네요.

늦었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거든요. 일단 저지르세요. ‘이카루스’라는 노래 가사에 이렇게 썼어요. “가만히 숨을 죽인채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다른 사람은 바꿀 수 없지만 나를 바꿀 순 있거든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면 돼요. 그래서 저는 여성분들이 더 많이 소리 내고 더 많이 표현하고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찾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는 OECD 최악의 성평등도를 가졌기 때문에 제약이 많죠. 육아 휴직을 한 번 쓰면 그다음에 회사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모르고 복귀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솔직히 알 수 없어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예요. 내가 할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또 시도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다음 도전은 자우림 12집입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가장 중요한 도전이에요. 11집 앨범이 워낙 좋아서 ‘다음 앨범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예요. 내년 겨울 12집 정규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에요.

10년 뒤 어느 날, 윤아의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요?

지금이랑 비슷할 것 같아요. 계속 일이 뇌의 80% 정도를 차지할 테고, 그때 되면 민재는 성인이잖아요. 평범한 하루 안에서 한 번씩 모여 좋아하는 걸 함께 하고, 또 따로 누릴 수 있는 거는 응원해 주는 사이면 좋겠어요. 우리 셋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베프’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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