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36 MY ROLE MODEL

TIME TO WONDER

에디터  김현지, 김여진 

포토그래퍼  정연화

되고 싶은 나를 그리며 작은 씨앗을 품어야 하는 아동기. 가족의 버팀목이 되어 자신의 시간을 나누는 ‘가족돌봄아동’이 있다. 피어날 삶을 기다리며 비어진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어린이들에게 힘찬 응원이 필요하다.

나를 돌보는 연습

서은아 《응원하는 마음》 작가, 응원대장 올리부

만나서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응원대장 올리부입니다. 《응원하는 마음》을 썼어요. 페이스북의 모회사인 메타에서 일본, 한국, 호주, 뉴질랜드 4개국을 담당하며 브랜드들의 성장을 돕는 마케터로 일해요.

어쩌다 응원대장으로 부르고 불리게 되었나요?

갓 마흔 넘었을 때 호주로 여행을 갔다가 침대 머리맡에서 《THE 50 BOOK》이라는 책을 발견했어요. 50대가 된 여성 50명을 인터뷰하며, 50개의 단어를 키워드로 남겼더라고요. 내가 다가갈 나이가 50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51번째 인터뷰이가 된다면 어떤 단어를 남길까 생각해 봤어요. 나의 10대, 20대, 30대, 40대를 처음으로 돌아봤고, 앞으로 삶에 남겨놓아야 할 만큼 열망했고 계속하고 싶고 잘하는 게 뭔지 곰곰이 따져봤죠. 회사에서 PT 발표를 할 때마다 마지막 장에 “응원합니다!”라고 끝을 냈거든요. 인지하지 못했는데, 인턴들이 저를 쫓아다니며 흉내를 내더라고요. 나의 응원이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때 희열을 느꼈어요.내가 한 사람분이 아니라 백 명, 천 명의 삶에 영향을 끼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죠. 앞에서 리드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전하는 응원단을 꾸려야겠다는 생각에 ‘응원대장’이라는 단어를 인스타 프로필에 적었어요.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맡으며 노력하는 시간만큼 내가 나에게 부여한 이름도 증명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매일 그 단어를 볼 때마다 ‘맞아. 나를 응원대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지. 오늘 응원했던가?’ 돌아보는 거예요. 그 시간들이 흘러 지금은 많은 분들이 ‘응원대장 올리부’라고 불러주시죠.

많은 팀원을 이끄는 리더이자, 한 아이의 엄마, 누군가의 딸이기도 하죠. 많은 역할을 촘촘하게 해내는 하루가 궁금해요.


고등학생인 딸이 먼저 일어나서 본인 준비를 하고, 저를 깨워요. 어머니와 함께 살다 보니 챙겨주시는 아침을 먹고,아이 학교에 데려다 주면서 “좋은 하루 보내!”라고 첫 응원을 보내요. 회사에서 여덟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집중하고, 퇴근하고 저녁 7시쯤 아이 학원 앞 도서관으로 가요. 일하는 엄마라 물리적으로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때가 이동 시간이더라고요. 학원 앞 구청 도서관에 가서 아이를 기다리며 글을 쓰거나 강연 준비를 하고 아이가 학원을 마치면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요. 씻고 정리한 다음 밤 10시쯤 리추얼 커뮤니티 친구들과 온라인 줌 회의실을 열어요. “여기는 응원의 방이야. 누구나 들어와서 자유롭게 화면 켜고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공유하자.” 밤 11시 45분쯤 마이크 켜고 “오늘 하루 어땠어?”라는 마지막 안부를 물으며 굿나잇 인사하면 자정쯤 돼요. 아이가 보통 새벽 2시쯤 잠들어요. 제가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공부하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동일한 시간을 한 공간에서 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친구가 공부하는 것으로 본인의 나이대에 해야 하는 생산의 시간을 보낸다면 엄마 나이 때에 책상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시간은 어떤 건지를 보여주는 것이 제가 아이한테 하는 응원 방식이에요. 각자 일을 마치고 함께 침실로 가서 잠들죠.

고등학생 아이랑 함께 방을 쓰는 거예요?

재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집을 조금 고치면서 방이 두 개가 생겼어요. 옵션이 두 가지 있었는데, 아이가 엄마랑 시간을 보내겠다고 해서 일하는 방, 자는 방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어요. 남편은 옆방을 쓰고요. 저는 어떤 결정이든 보편적인 기준에 거부감이 큰 편이에요. 자연스럽게 가족만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게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노력을 꽤 많이 했어요. 아이가 언젠가 이제 엄마 없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단절이 아닌 독립의 형태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아이와 꽤나 많이 했고, 형태에 대한 것도 고민했죠. 우리 집은 거실에도 커다란 책상이 있거든요. 아이가 과외를 할 때나 “엄마 나 혼자 하고 싶어.” 하면 제가 거실 공용 책상을 써요. 또 워크룸 문을 반투명 유리문으로 만들었어요. 실루엣 정도만 보여도 저는 안에 있는 아이 존재를 느끼고, 아이도 ‘엄마가 저기 있지.’라고 짐작하죠.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은 어떤 것일까 묻고 답하며 결정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었어요.

오랜 시간 부모님의 돌봄을 받다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되었을 때, 어땠어요?

서른넷에 엄마가 되었어요. 처음 맡는 역할인데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정말 무서운 거예요. 회사 일은 실패해도 다음에 잘하면 되지, 실패하면 이건 러닝이지,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아이 일은 달랐어요. 기저귀 하나를 잘못 샀는데 다음 날 엉덩이가 빨개지고 괴로워하면, 내일은 그러지 않아야지 하는 걸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내가 했던 결정이 아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정말 겁나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이 태어나고는 그동안 살아온 것들에 ‘왜 이렇게 해야 하지?’ 하는 질문이 많아졌어요.

어떤 물음이었어요?

일하는 엄마이다 보니 친정엄마에게 보았던 레퍼런스와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있는 거잖아요. 주변에 제가 택할 수 있는 롤모델이 없었어요. 친정엄마도 “원래 애들은 엄마가 키워야 돼.”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러면 저는 “그런 게 어딨어?” 하고 물었고, “아이하고 엄마의 관계는 이래야 돼.”라고 얘기하면 “그 관계를 성립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답이 돼?” 하는 것들을 질문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번은 퇴근하고 왔더니 아이가 TV에다가 크레파스로 잔뜩 낙서해 놓은 거예요. 지우려고 물티슈로 쓱 닦았는데 너무 잘 지워지길래 문득 얘가 여기에 그릴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려봤는데 정말 기분이 좋은 거예요. “너 진짜 즐거웠겠구나.” 하면서 같이 TV에 그림을 그렸어요. 뒤에서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쯧쯧 엄마라는 사람이. 원래 TV에는 그림 그리는 게 아니야. 보라고 있는 거지.”라고 혼을 내시면 제가 아이랑 똑같은 마음으로 “원래 그런 게 어딨어요? 예술가 백남준을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죠. 원래 그런 게 아닌 우리 식대로 뜻을 매기곤 했어요. 한번은 중학교 교복 맞추러 갔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치마 교복이야.” 하면서 물어보지도 않고 주셨어요. “여자애들은 원래 치마 입는 거야.”라고 하시는데 “그런 게 어딨어요? 제가 바지 입겠다고 하면 입는 거죠.”라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짜릿했어요. 세상에 어떤 답이든 우리 기준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힘을 이렇게 키워가는구나, 나도 매 순간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와 자라면서 매 순간 나만의 기준을 세워야 하는 거 같아요.

아이를 어렵게 가졌어요. 기다리는 시간이 꽤나 길었던상태에서 아이가 찾아왔는데, 처음에는 점만큼 작잖아요. 그 점 하나 생긴 순간, 배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느낌이 없는데도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얘가 어떤 얼굴이었으면 좋겠고, 키는 얼마였으면 좋겠고, 나중에 커서 어떤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런 마음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커지는 걸 보고 부모가 된다는 건 ‘욕심덩어리가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한테 욕심을 부리려면 그걸 이루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한다는 건데, 내가 그만큼 애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게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맞는 밸런스인가? 아이를 위해 애쓴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엄마 됨의 마음이었어요. 아이 낳고 복직하며 모든 엄마들이 겪는 그 시간을 똑같이 지났어요. 모유 수유를 8개월까지 했는데 ‘1년까지는 해야 한다’. ‘초등학생 때는 엄마가 필요하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줏대 없이 흔들리던 시간들이 있었죠. 근데 어느 순간 이 모습이 내 아이가 살아갈 모습이라면 어떨까 하며 제 삶을 봤단 말이에요. 아이 때문에 한 사람의 삶을 멈췄다, 포기했다는 건 제가 생각하는 건강한 삶의 공존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이가 나한테 요구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멈춰놓고 너 때문에 내가 멈춘 거라고 얘기한다는 게 공정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천 번을 주저하던 그 순간들이 이 친구한테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내 아이는 주저하지 않는 삶을 사는 여성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마음먹은 건 ‘멈추지 않는 엄마가 되는 것, 내 삶을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어요. 아이 덕분에 살아가는 그 시간이 엄마 된 시간들의 여정이에요.

역할이 많다 보면 나를 위한 건 제일 뒤로 밀리잖아요. 나를 지켜내기 위한 연습을 어떻게 했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팀장이 되면서 내 시간은 그대로인데 역할은 두 배, 세 배가 되었어요.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레벨은 똑같은데 말이죠. 시간을 양적으로 늘리지 못하면 질적으로 농축해 쓰자는 생각이었어요.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학생 개발자 멘토링을 맡고 있었는데, 업무 시간 외에 약속이 잡힐 때도 있잖아요. 이 친구들이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제가 불같이 화를 냈어요. 정말 화가 났어요. 그 친구들이 늦은 5분이 나만의 5분이 아니라 내 딸이 희생한 5분이고 우리 엄마가 애써야 하는 5분인 거예요. 그들에게 이게 몇 배 시간인지 강조했어요. 그리고 어지간하면 오후 6시 이후에는 예외 사항을 주지 않았죠. 그러다 ‘나를 위한 시간은 어딨지?’ ‘왜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지?’ 현타가 오는 시점이 있었어요. 그때 ‘24시간 중 한 시간은 나를 위해서 보내자.‘고 마음먹고 운동을 시작했어요. PT를 받고 필라테스를 배우며 선생님들 도움을 받아서 그 시간들을 애써 가졌어요. 근데 그 한 시간은 나머지 열 시간을 노력해야 지켜낼 수 있는 거예요. 열 시간에서 뭔가 하나라도 삐끗하면 그 시간이 삭제돼요. 일주일에 네 번씩 운동했는데, 매일 달려왔어요. 헉헉대고 뛰어와 끝나자마자 샤워를 5분 만에 하고 달려나갔어요. 그렇게 몇 년을 해내니까 아이도 컸고 저도 힘이 생기더라고요. 어느 순간, 아이에게 엄마의 시간도 너의 시간과 공존하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이에게 한 시간 책을 읽어줬다면 “엄마 책은 이런 거야. 이 책을 너한테 읽어줄 수 없는데 엄마도 책 읽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자주 이야기했어요. 아이의 시간과 내 시간이 공존하도록 하는 게 엄마로 살면서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이었어요.

저서 《응원하는 마음》에서 몇 해 전 병마와 싸우던 아버지 곁을 지킨 경험을 들려주었어요.

아버지가 아픈 기간에는 하루에 제가 쓸 수 있는 응원의 전부를 아버지에게 썼어요. 그런데 기대했던 것보다 짧게 머물러 주셨고, 세상을 떠나시니까 ‘도대체 응원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제 계시던 분이 오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삶은 가벼운데, ‘나는 왜 이렇게 무겁게 열심히 사는가.’ 이런 생각에서 헤어 나오기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회사도 휴직했고 나를 지키는 시간도 다 멈췄어요. 아버지의 상실 이후에 그것들을 소화해 내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를 다시 세우는 게 과제처럼 느껴졌어요. 아버지가 자신의 물건들을 단출하게 정리를 하셨는데도, 서류며 프로세스 같은 것들이 정말 많았어요. 쌓여 있는 종이 조각들을 보고 ‘저러다 쓰레기 되겠네.’ 싶어서 별생각 없이 풀칠해서 수첩에 붙였어요. 10장, 20장을 붙이고 있는데 문득 내일은 여기다 뭐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거예요. 매일 일기를 쓰고 영수증이며 스티커며 별것 아닌 종이들을 붙이던 습관을 한 달가량 멈추고 있었는데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어요. ‘아, 이게 삶의 본궤도로 돌아가는 방식이구나.’ 느꼈죠. 그래서 리추얼을 다시 시작했고, 회사로 돌아왔어요. 제가 부재하던 시간에 저를 지켜준 친구들의 시간에 보답하기 위해서 일주일을 버티고 한 달을 견뎠어요. 사력을 다해 나를 위한 시간을 지켜오지 않았다면 한 달 이내에 ‘나는 다시 해낼 거야.’라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을 거예요.

응원하는 일이 처음엔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고 생각하지만,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걸 받는 거 같아요.

맞아요. 예전에는 제가 더 준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Give More Than Take’라는 말이 있어요. 응원의 시작은 ‘내가 1을 받았으니 상대에게 2를 줘야겠다’ 였어요. 그런데 제가 상실을 겪었을 때 하루 만에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찾아 오셨어요. 이런 마음을 되돌려 받으려고 이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을 했나, 내가 했던 응원들이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잠깐 그들에게 맡겨놓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응원을 해서 친구가 회복하면 나는 기쁨을 얻는 거고, 내가 무너진다면 내가 했듯이 나에게 마음을 전해주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어요. 서로를 응원하는 거죠.

어른인 우리도 아이나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는데, 우리 주변에 가족을 돌보는 아동이 많아요. ‘초록우산 가족돌봄아동’에 대해 알고 있나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UN의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서 우리가 풀어내야 되는 문제를 정의하는 프로젝트를 했을 때,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불균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주변의 어려움에 대해 많이 알려고 노력했는데, ‘가족돌봄아동’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어요. 처음엔 ‘가족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인가?’라고 생각했다가 ‘가족을 돌보는 데 책임을 지고 있는 아동’이라는 말을 새로 배웠어요. 이런 아이들이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여전히 꿈이 많은 어른의 모습인데요, ‘초록우산 가족돌봄아동’ 캠페인에서 봄이는 꿈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요. 꿈꿀 수 있는 힘은 어떻게 길렀어요?

우리 집에서 한동안 꿈 질문이 금지였거든요. 아이는 어른들은 뭐가 되고 싶냐고 왜 자꾸 물어보냐고, 불만이었어요. 그래서 아이한테 묻는 대신에 제가 하고 싶은 걸 얘기했어요. 이 수첩에도 하반기 때 이룰 꿈을 가득 써놓고, 노력해요. 저는 조그마한 물건을 참 좋아하는데요, 그것들이 책상 안에만 있으면 좋아한다는 마음을 느낄 수가 없어요. 좋아하는 건 내 눈앞에 놓고 매일매일 만지고 아껴주고 노력해야 그 마음이 녹슬지 않고 더 커지고 또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멈추지 않고 계속 꿈꿀 수 있는 힘은 계속해서 좋아하는 거예요.

단단한 현실의 벽 앞에서 주저하는 봄이에게 어떤 얘기가 도움이 될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기만 한 삶은 거의 없어요. 누구나 다 어느 순간 어렵고, 어느 순간 이루고, 어느 순간 행복하고, 어느 순간은 좌절할 수 있어요. 그런 시간의 터널들을 지나갈 때 이것이 나만 겪는 일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누구나 오는 삶에서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원대한 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룰 작은 꿈들을 적어놓고 하나씩 이루는 연습을 하면 좋겠어요. 오늘 저는 주변의 세 명에게 응원 전하기가 꿈이에요. 그러면 이룰 수 있잖아요. 세 명에게 메시지를 남기거나 전화해서 너를 응원한다고 얘기하면 제 꿈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작은 꿈들부터 자꾸자꾸 쌓아서, 그 꿈들을 이루어낸 순간들이 원대한 꿈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연습해 보자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응원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이세나 엽서 칼럼니스트

안녕하세요. 《wee》 매거진에서 처음 만나요. 소개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엽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캘리그래퍼 이세나입니다. 굳세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작가님 이름을 들으니 ‘굳세다’ 라는 단어가 떠 올라요. 사전적으로 “힘차고 튼튼하다, 뜻한 바를 굽히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힘이 있다.” 는 형용사잖아요. 작가님은 어떤 사람인가요?

조용한 사람, 내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엄마가 항상 아버지를 보살피셨어요. 아픈 아버지를 챙기느라 힘든 엄마를 보며 엄마에게 무언가 요구를 하거나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까지 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죠. 어린 시절의 나 역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였는데, 내가 어른인 엄마의 마음을 돌보려고 했던 거예요. 이런 마음의 무게들 때문에 저 자신을 돌보지 못해 자존감이 낮고, 언제나 타인이 먼저였던 사람이었어요.

의외의 모습이에요.

캘리그래피를 배우면서 내 마음을 돌보게 되었고 성격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죠. 작업을 하는 동안 온전히 집중해서 글씨를 쓰고, 다듬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결국엔 저를 보듬는 일이었어요. ‘굳세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어려운 상황도 잘 이겨낼 수 있었는데, 이름처럼 성장해야겠다는 마음가짐 때문인 것 같아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돌보던 경험이 있나요?

어릴 때 친척들과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아서 사이가 좋아요. 특히 이모와의 관계가 좋은데 이모가 암 투병을 하던 시기가 있어요. 오랜 시간 요양 병원에만 계셨는데, 이모가 고향을 굉장히 그리워하셨어요. 그래서 매일 엽서를 써서 고향 소식을 전했지요. 진달래가 피었다는 소식, 어릴 때 함께 쑥을 캐서 쑥떡을 해 먹던 이야기 같은 소소한 계절의 변화나, 고향에서 함께하던 추억들을 매일매일 엽서에 적어 보냈어요. 이모가 그 엽서를 보면서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고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타인을 보살피려면 자기 자신도 잘 챙겨야 할 텐데요.

맘을 다해 응원을 보낼 수 있잖아요. 제가 SNS에 게시물을 올리면 많은 분이 “작가님 덕분에 오늘도 힘낼 수 있어요.” , “작가님의 글이 큰 위로가 됐어요.” 라는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 하나하나가 저를 위한 응원이 되어 누군가를 보살필 힘이 돼요.

다양한 소재의 재료를 작업에 쓰고 있어요. 꽃잎, 잎사귀, 줄기, 물방울... 밥풀까지요! 어디서 영감을 얻어요?

주변의 모든 사물 그리고 어린 시절이요! 얼마 전엔 제가 밥을 먹다가 숟가락에 묻은 밥풀을 봤는데, 하트 모양인 거예요. 그래서 밥풀 두 개를 붙여서 하트를 만든 다음에 “밥은 사랑이야” 이런 메시지를 만들었어요. 산책할 때도 자주 멈춰 ‘이 계절엔 이런 꽃이 피었지.’, ‘이 길에는 이런 나무가 있었네.’ 하면서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아요. 산과 들과 냇가에서 꽃을 따서 소꿉놀이하고, 산수유 열매를 따 먹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행복이 천천히 스며들어 계속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영감이 되어 주고 있어요.

특별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2025년도 달력을 함께 만들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가족돌봄아동들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한창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꾸는 나이에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하는 큰 책임감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버거울까요?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열두 달 중 한 달이라도 제 그림과 글귀가 쓰인 달력을 보고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어요. 달력을 보는 사람들이 가족돌봄아동을 위해 따뜻한 마음을 보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가족돌봄아동을 위해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세요.

전 그 아이들이 참 외로울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혼자가 아니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또 ‘작고 소소한 꿈이라도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 는 말을 하고 싶고요. 제 꿈은 TV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가는 거예요(웃음). 이 꿈을 가지고 제 삶에 충실히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저처럼 가족돌봄아동들도 꿈을 가지면 좋겠어요. 작고 소소하고, 어쩌면 막연한 꿈이라도 말이에요. 꿈을 꿀 수 있는 작은 틈이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달력 페이지 중에 이 메시지를 독자분들과도 함께 나누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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