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38 MY ROLE MODEL

WITH YOU,TOGETHER WITH US

에디터  김여진

포토그래퍼  HaeRan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초록의 나무와 숲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동네, 부암동에는 작은 이탈리아가 있다.이탈리아와 사랑에 빠진 세 자매는 이탈리아에서 지낸 경험으로 저마다 개성이 담긴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성격과 외모, 직업은 다르지만 서로 닮아가며 멋진 어른으로 나이들기 위해 서로 보듬는다.

부암동에서 만나는 시에나의 조각들

박만영 첫째 이탈리아 식료품점 알리멘따리 꼰떼 운영 

박소미 둘째 이탈리아 와인&소품숍 보테가 꼰떼 운영 

박소진 셋째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 트라또리아 꼰떼 운영

여진 오늘 비가 정말 많이 와요. 날씨가 얄궂어 걱정이었는데,오늘 세 분 의상을 보니 알록달록한 패턴에 눈이 너무 즐거워요. 제가 손님으로 몇 번 왔잖아요. 처음 만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길게 이야기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네요.


만영 안녕하세요. 이탈리아 식료품점인 알리멘따리 꼰떼Aliementari Conte를 운영하는 세 자매의 큰언니이자 베니스에서 판화를 전공하는 대학생 딸 희서의 엄마 박만영입니다.


소미 시에나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보떼가꼰떼Bottega Conte에서 이탈리아 와인과 리빙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둘째 박소미예요.


소진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 토스카나 시에나 지역의 가정식을 만드는 레스토랑 트라또리아 꼰떼Trattoria Conte를 운영하고 있는 막내 박소진입니다. 열 살이 된 반려견 얀이를 키우고 있어요.


여진 오늘 세 분 의상을 미리 맞추셨나요? 큰언니의 레몬 프린트 셔츠, 둘째 소미 씨의 파란색 패턴의 드레스, 소진 씨의 강렬한 빨간색 스커트. 이탈리아의 선명한 여름이 떠오르는 착장이에요.


소미 그런가요? (손의 반지를 보여주면서) 이런 액세서리도 다 이탈리아에서 사 온거예요. 10년도 더 된 제품이네요.


소진 의도한 건 아닌데 빨강, 노랑, 파랑이네요(웃음).


여진 세 자매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게 있나 봐요.꼰떼의 시작이 궁금해요. 가장 먼저 트라또리아 꼰떼가 부암동에 자리를 잡았잖아요.


소진 맞아요. 2020년 12월에 트라또리아 꼰떼가 오픈했고, 그다음 2021년 5월에는 알리멘따리 꼰떼, 2022년 5월에 보테가 꼰떼가 오픈했어요.


여진 왜 부암동을 선택했어요?


만영 부암동은 저희가 살던 이탈리아 시에나 지역이랑 많이 닮았어요. 높은 건물이 없고 지척에 초록의 숲과 산이 있고,오랜 시간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이 많고,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가 많다는 점들이요.


소미 트라또리아 꼰떼가 소박한 이탈리아의 가정식을 선보이는 곳이잖아요. 그런 의미로 화려하거나 유동 인구가 많지 않아도 소박하고 정감 있는 부암동이 너무 잘 어울렸어요.


여진 이탈리아에서 보낸 날들이 세 자매를 부암동으로 이끌었군요. 그럼 언제 이탈리아로 간거예요?


소진 제가 제일 먼저 갔어요. 2001년에 피에몬테주 아스티에 있는 ICIF로 요리 공부를 하러 갔거든요.


만영 생각난다! 네가 이탈리아로 갈 때 내가 만삭이었는데 짐도 싸주고 공항에도 같이 갔잖아(웃음).


소미 그다음은 저예요. 저는 소진이가 이탈리아 유학 중일 때 여행을 갔다가 이탈리아어가 주는 매력에 빠졌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탈리아 언어를 공부해 보고 싶어서 2003년에 갔고 시에나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밀라노에 있는 삼성에서 일을 시작했죠. 만영 언니는 그즈음에 왔지?

만영 맞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2010년에 딸을 데리고 갔죠. 남편은 한국에 남아 있었고요.


여진 이탈리아에 있을 때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탈리아의 삶이 세 자매 인생에서 아주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만영 이탈리아는 저희에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죠.이탈리아에 가지 않았더라면 삶을 대하는 태도랄까, 그런 것들이 많이 좁혀져 있는 상태로 계속 나이 들었을 거예요. 이탈리아에 가기 전엔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 채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탈리아에 가서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고, 제가 만난 이탈리아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보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갖게 되었어요. 이탈리아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스스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이죠.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항상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죠.


소미 저 역시 언니랑 비슷해요. 한국에 있었을 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평가했거든요. 그런데 아주 사소한 부분도 서로 칭찬을 해주고 각자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개성을 인정해 주는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를 배우게 됐고, 사회가 정한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맞추기보단, ‘내가 정말로 행복한 것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저 자신을 더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이웃에 대한 배려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라는 고민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적인 문제나 이슈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있어요.


소진 저는 이탈리아에서 가족애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물론 홈스테이로 만났던 가족이 너무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셔서 그럴 수도 있지만요. 뭐랄까,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분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아요. 조카가 베니스에 있는데 그분이 마치 친할머니처럼 챙겨주고 있거든요..


소미 우리 세 자매의 가족이나 다름없죠.


소진 어떤 의미로는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애정 표현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만영 ‘우리가 이렇게 넘치는 사랑과 애정을 받아도 되나.’ 할 정도로 한국에서 온 딸들이라고 생각해 주시거든요.


여진 그런 분을 만나서 더욱더 이탈리아 생활이 행복했겠네요. 세 분이 같이 있어서 의지가 되었을 것 같지만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여러 가지로 쉽지는 않잖아요.


소미 그렇죠. 제가 유학 생활을 했을 때는 지금처럼 K-POP도 없고 한국을 잘 아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지금보다 더 심했고, 언어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소진 언니, 그런 적도 있었지. 보증금도 못 돌려받고.


소미 맞아. 이탈리아어가 서투니까 행정적인 부분에서 피해를 본 적도 있어요. 제가 언어학을 전공했잖아요. 외국인이 그 나라 언어를 전공한다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요. 정말 두 배, 세 배 더 노력했어요.


만영 소미가 고생 많이 했어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정말 더 열심히 했고요.


소진 저는 요리 학교 친구들의 “너 어디서 왔니?”라는 물음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해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어요. 그 점이 조심스럽더라고요. 언어도 서툴러서 ‘혹시 내가 잘못 설명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됐고요.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이탈리아 사람들도 한국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알고 있더라고요.


여진 만영 씨는 어땠어요? 두 분과는 다르게 아이와 함께 생활하셨잖아요.


만영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체류하면서 겪는 행정적인 부분이었어요. 당시 유학생 비자로 갔는데 미성년 자녀를 귀속해서 갔기 때문에 매년 비자를 갱신해야 했거든요. 언어도 서툰데 행정적인 부분을 처리해야 하니 너무 어려웠어요. 아이는 초중고를 이탈리아에서 나왔는데 사춘기 때는 인종차별과 약간의 따돌림을 당했던 적이 있어요. 제가 힘들어할까 봐 바로 얘기하지는 않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말해주더라고요. 그걸 알고 미안했죠. ‘과연 내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이 아이를 키우는 게 옳은 선택일까?’라는 후회도 들었고요. 그런데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때 힘들었던 시간 덕분에 지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고요. 


여진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늘 행복했던 건 아니었네요.하지만 그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지나오신 것 같고요.


소진 네. 그래서 저희가 지금 꼰떼를 운영할 수 있네요.


여진 세 자매가 일하는 장소가 같은 데 사는 곳도 같다고요? 성인이 되어 각자의 가족이 생기면 이렇게 원가족이 모여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만영 그렇죠. 쉽지 않죠.


소미 부모님의 원대한 계획이었거든요. 세 자매가 오손도손 모여 사는 것! 그래서 두 분이 평생 힘들게 모으신 돈으로 이렇게 저희가 모여 살 수 있게끔 해주셨어요.


소진 그리고 우리 셋이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해요(일동 웃음).이탈리아에서 살았던 것도 공통분모이고요.


만영 중요한 건 우리 남편들이 다 착해요. 저희는 아침에 일어나면 잠옷 바람으로 서로의 집에 가요. 가서 “커피 있어?” 물어보고 마시고 오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마 제 남편이 이런걸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면 모여 사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맙게도 늘 붙어 있는 세 자매를 많이 존중해 주거든요.


여진 와!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다 보면 종종 싸울 때도 있지 않나요?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어떤 식으로 풀어가나요?


만영 셋 의견이 다른 경우는 별로 없어요. 물론 매일 사이가 좋기만 한 건 아니지만 사소한 걸로 아옹다옹한다고 해야 하나요? “이 물건 왜 제자리에 안 뒀냐.” , “너 옷이 그게 뭐냐.” 이런 거 있잖아요.


소미 현실 자매들이죠.


소진 저는 주로 언니들 말을 잘 들어요(웃음).


만영 의견 충돌이 있다고 해도 자기가 잘못한 거는 바로 반성 하고 그때 그때 풀기 때문에 응어리지는 건 없어요.


소미 다른 집에 비해 사이가 좋아요. 왜 그러지?


소진 몰라요. 저희가 좀 독특해요(웃음).


여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어요. 어릴 때도 사이좋은 자매들이었나요?


만영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저랑 소미는 일곱 살, 소미랑 소진이가 연년생이니까 소진이랑은 여덟 살 터울이죠.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를 도와서 동생들의 천 기저귀를 같이 개켜야 했어요. 그게 싫어서 일부러 집에 늦게 온 적도 있고요.


소미 소진이랑은 연년생 자매지만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았어요. 소진이가 워낙 착하고 양보를 잘해서 싸울 일도 크게 없었고요. 중학생 때였나, 만영 언니가 첫 월급을 탔다고 패스트푸드점에 데리고 가서 햄버거를 사준 적이 있어요. 그런 게 너무 좋았죠. 그리고 언니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잘했어요. 엄마가 해주지 않는 파스타를 종종 만들어 줬거든요. 성인이 된 언니를 동경하며 닮고 싶어 하던 기억이 나요.….


소진 저도 기억나요. 언니가 해 준 음식은 다 맛있었어요.

여진 세 분이 같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떤 길을 가더라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부모님께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점은 뭔가요?


소미 저희가 이탈리아에 가서 살게 된 건 모두 엄마 덕분이에요. 엄마는 무척이나 호기심이 많은 분이셨어요. 하고 싶은 것도 굉장히 많으셨고요. 일찍 결혼해서 저희를 키우느라고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그 당시엔 여성의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잖아요. 그래서 엄마의 무한한 호기심과 넘치는 열정을 우리가 펼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밀어 주셨어요. 


소진 맞아요. 요리 학교 팸플릿을 주면서 유학을 제안한 사람도 엄마였고, 만영 언니에게 딸을 데리고 가서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라고 이야기 한 것도 엄마예요.


소미 늘 ‘너희가 더 큰 세상을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랑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도 <세계테마기행>이거든요.


만영 엄마는 맛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강했어요.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온 나라의 음식들, 다양한 향신료를 맛보는 것에 거부감이 없고 심지어 좋아하셨어요. 아마 유전적으로 엄마의 호기심이 저희 세 자매에게도 있었기에 오랜 시간 해외 생활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여진 그러네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꼰떼의 시작은 어쩌면 어머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지만, 세 자매의 성격이나 성향은 각자 다르지 않나요?


만영 그럼요. 젊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외향적이고 자신감도 강했어요. 그런데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성향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균형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밝고 사교적이지만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이 반반 있어요.


소미 저도요. 언니랑 비슷한 것 같은데 셋 중에 가장 추진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행동하고 실행하는 편이거든요.


만영 얘는 정말 똑 부러져요.


여진 어른들이 그런 말씀 하시잖아요. 아이가 셋이면 둘째가 제일 야무지고 똑 부러진다고요.


소미 생존 본능이죠(웃음).


소진 저는 언니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내향형이에요.


만영 우리 막내는 정말 섬세하고 차분해요. 감수성도 풍부하고요. 어떤 면에서 가장 언니 같을 때도 있고. 


소미 소진이는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나요. 언니랑 소진이 둘 다 미술을 전공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대학교 학부는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저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었고 늘 정해진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게 살고자 했어요.


만영 소미는 저와 소진이에게는 없는 추진력과 냉철한 판단력을 갖고 있어요.


여진 세 자매가 서로 보완해 가면서 시너지를 내는 것 같아요. 세 분이 서로에게 닮고 싶은 점은 무엇일까요?


소진 전 생각이 많은 편이라 결정하고 실행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언니들의 담대함과 결정하면 바로 행동하는 추진력을 닮고 싶어요. 


소미 소진이의 섬세함과 언니의 뛰어난 예술적인 감각, 색감 이런 것들을 닮고 싶어요.


만영 소미를 보면서 제가 더 젊었을 때의 모습을 발견해요. 어쩌면 지금은 잃어버린 열정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요. 소진이는 인간적이고 착해요. 남을 잘 챙기는 따뜻한 성격은 닮고 싶은 부분이에요. 


소미 아냐, 요즘은 많이 못돼졌어(일동 웃음)


만영 그래서 귀여워요(웃음). 사실 예전엔 소진이가 너무 착하기만 해서 걱정이었는데 요즘엔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이기적인 면이 생긴 것 같아 다행이죠. 언니들이 보기엔.

여진 세 분의 롤모델에 관해 듣고 싶어요.


만영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에 나온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라는 배우를 무척 좋아하고 본 받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여성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고 하는 게 좋을까요? 뛰어난 연기력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분이 유니세프 친선 대사인데 열심히 인권 운동을 하시거든요. 제가 알기론 20대 때부터 인도주의 활동을 열심히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 딸도 그렇게 이타적이고 사회에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소미 아까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탈리아에 있을 때 홈스테이를 했던 집의 피에란나Pieranna 아주머니요. 저는 그분을 만나면서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 인식, 신념, 이런 것들이 모두 바뀌었어요. 가족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사랑이 넘치게, 그리고 사랑을 주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피에란나 아주머니는 음식 솜씨도 좋아 그 분께 요리도 많이 배웠어요. 지금 트라또리아 꼰떼의 메뉴에서도 아주머니의 레시피에 영감을 받은 것들이 있어요. 한국 문화나 음식에도 관심이 많으셨는데, 단순히 한국이 궁금했다기보다는 제가 한국 사람이라서 더 알려고 하신 것 같아요. 그만큼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분이죠.


소진 조금 쑥스러운데, BTS 뷔요. 사실 뷔를 닮고 싶다기보단 뷔가 했던 말 덕분에 제가 힘들었던 시기를 이겨낸 적이 있어요. “세상에 힘든 건 하나도 없다. 다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데 뭐 힘든 거라고.” 그 말을 했을 땐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을 때 였는데,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정도로 강렬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꿈을 위해 매 순간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저보다 어리지만 정말 대단하고 닮고 싶어요.


여진 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쳤어요. 10년 후 꼰떼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져요. 세 자매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어요?


소미 음, 트라또리아 꼰떼는 꼰떼 세 자매의 상징 같은 곳이잖아요. 그래서 부암동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아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부암동에서 가장 먼저 꼰떼를 떠올리면 좋겠어요. 그리고 소박한 이탈리아 가정식을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곳,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트라또리아 꼰떼 초기에 피자를 판매하다가 지금은 여러 이유로 못 하고 있는데, 멀지 않는 미래에 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핏제리아를 오픈하고 싶어요.

여진 오! 정말 기대돼요. 핏제리아가 생기면 꼭 첫번 째 손님으로 올게요.


소진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수녀원에 자원봉사를 다녔거든요. 봉사 활동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정말 뿌듯하고 기뻤어요. 그래서 꼰떼 세 자매의 이름으로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거나, 레스토랑 휴무 때 형편이 어려운 분들을 초청해서 음식을 대접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가진, 베푸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어요.” 


만영 전 소박해요. 멋있는 할머니가 되는 거? 제가 마흔에 이탈리아로 떠났고 50대에 알리멘따리 꼰떼를 시작했어요. 그럼 60살이 되면 내 삶엔 또 어떤 변화가 생길까, 기대가 돼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금처럼 세 자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늙어가는 멋쟁이 세 할머니가 되는 게 제 소망이에요.


소미 어디 요양원이 좋다더라 하는 정보도 좀 나누고요(웃음). 참, 그리고 10년 후 꼰떼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세 자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많이 팔리진 않아도(웃음). 우리에겐 하나의 도전이고 꿈이에요.


만영 저도 소미랑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마음먹고 입으로 내뱉으면 대부분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 가게 된 것도 그렇고요. 그래서 왠지 우리 세 자매 이야기도 책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Come dico io(꼬메 디코 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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