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영 맞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2010년에 딸을 데리고 갔죠. 남편은 한국에 남아 있었고요.
여진 이탈리아에 있을 때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탈리아의 삶이 세 자매 인생에서 아주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만영 이탈리아는 저희에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죠.이탈리아에 가지 않았더라면 삶을 대하는 태도랄까, 그런 것들이 많이 좁혀져 있는 상태로 계속 나이 들었을 거예요. 이탈리아에 가기 전엔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 채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탈리아에 가서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고, 제가 만난 이탈리아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 모습을 보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갖게 되었어요. 이탈리아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스스로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이죠.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항상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 인생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죠.
소미 저 역시 언니랑 비슷해요. 한국에 있었을 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를 혹독하게 평가했거든요. 그런데 아주 사소한 부분도 서로 칭찬을 해주고 각자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개성을 인정해 주는 이탈리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를 배우게 됐고, 사회가 정한 기준이나 타인의 시선에 맞추기보단, ‘내가 정말로 행복한 것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저 자신을 더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이웃에 대한 배려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라는 고민도 많이 했고요. 그래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적인 문제나 이슈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있어요.
소진 저는 이탈리아에서 가족애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물론 홈스테이로 만났던 가족이 너무 따뜻하고 좋은 분들이셔서 그럴 수도 있지만요. 뭐랄까,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분들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아요. 조카가 베니스에 있는데 그분이 마치 친할머니처럼 챙겨주고 있거든요..
소미 우리 세 자매의 가족이나 다름없죠.
소진 어떤 의미로는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애정 표현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만영 ‘우리가 이렇게 넘치는 사랑과 애정을 받아도 되나.’ 할 정도로 한국에서 온 딸들이라고 생각해 주시거든요.
여진 그런 분을 만나서 더욱더 이탈리아 생활이 행복했겠네요. 세 분이 같이 있어서 의지가 되었을 것 같지만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건 여러 가지로 쉽지는 않잖아요.
소미 그렇죠. 제가 유학 생활을 했을 때는 지금처럼 K-POP도 없고 한국을 잘 아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지금보다 더 심했고, 언어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소진 언니, 그런 적도 있었지. 보증금도 못 돌려받고.
소미 맞아. 이탈리아어가 서투니까 행정적인 부분에서 피해를 본 적도 있어요. 제가 언어학을 전공했잖아요. 외국인이 그 나라 언어를 전공한다는 게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요. 정말 두 배, 세 배 더 노력했어요.
만영 소미가 고생 많이 했어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정말 더 열심히 했고요.
소진 저는 요리 학교 친구들의 “너 어디서 왔니?”라는 물음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해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어요. 그 점이 조심스럽더라고요. 언어도 서툴러서 ‘혹시 내가 잘못 설명하는 거 아닌가?’ 걱정도 됐고요.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이탈리아 사람들도 한국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알고 있더라고요.
여진 만영 씨는 어땠어요? 두 분과는 다르게 아이와 함께 생활하셨잖아요.
만영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체류하면서 겪는 행정적인 부분이었어요. 당시 유학생 비자로 갔는데 미성년 자녀를 귀속해서 갔기 때문에 매년 비자를 갱신해야 했거든요. 언어도 서툰데 행정적인 부분을 처리해야 하니 너무 어려웠어요. 아이는 초중고를 이탈리아에서 나왔는데 사춘기 때는 인종차별과 약간의 따돌림을 당했던 적이 있어요. 제가 힘들어할까 봐 바로 얘기하지는 않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말해주더라고요. 그걸 알고 미안했죠. ‘과연 내가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이 아이를 키우는 게 옳은 선택일까?’라는 후회도 들었고요. 그런데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때 힘들었던 시간 덕분에 지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고요.
여진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늘 행복했던 건 아니었네요.하지만 그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지나오신 것 같고요.
소진 네. 그래서 저희가 지금 꼰떼를 운영할 수 있네요.
여진 세 자매가 일하는 장소가 같은 데 사는 곳도 같다고요? 성인이 되어 각자의 가족이 생기면 이렇게 원가족이 모여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