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39 HOME TO DREAMS

BRICK HOUSE BUILT ON LOVE

에디터  김수정

포토그래퍼  추정현 


네 아이를 키우며 쉼 없이 캔버스 앞에 서는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회화 작가 김란의 하루는 원망 대신 사랑으로, 나태함 대신 바지런한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밥을 짓고, 아이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치우고, 빨래를 하는 와중에도 영감을 찾아 집안 곳곳을 두리번거린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모여 그림이 되고 시가 되기까지 그는 무수히 많은 밤을 뒤척이며 지새웠다. 그 긴긴밤들에 대해 주인을 닮아 밝고 견고한 벽돌집에서 나눈 이야기들.

네 아이와 작품을 함께 키우는 집

"내 사랑에 비례하는 수많은 빨래들, 엉켜서 자는 아이들, 밤새 아프다가 열이 내려 들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 같은 것들.”

길 건너편에서부터 벽돌집이 눈에 띄었어요. 집을 소개해 주세요.

부모님이 오랫동안 사시던 집을 허물고 지은 곳이에요. 인연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연이재’라는 이름을 지었죠. 여름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아이들 넷이 문가에 다닥다닥 붙어서 지나가는 분들에게 인사해요. 동네에서 약간 명물 같은 집이 된 듯해요. 요즘에는 아이가 넷이나 있는 집이 없기도 하잖아요. 동네 다니다 보면 할머니들이 용돈을 주시기도 하죠(웃음).

설계 디자인에 적극 참여했다고요.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빠가 생전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시던 풍경과 구도를 그대로 살리고 싶었어요. 지금 거실의 구도와 소파 위치 모두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예요. 그게 첫째 조건이었고, 둘째는 벽돌이었어요. 이전 집의 정서와 느낌을 그대로 이어가려면 벽돌집이어야 했죠. 원래도 벽돌의 단단한 물성과 그것들이 쌓였을 때의 미감을 좋아해서 벽돌 시공을 잘하는 업체로 골랐죠. 셋째는 단단하면서도 단아한 집이었으면 했고요. 마치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듯이 집을 지었어요. 8미터가 넘는 물홈통을 공장에서 구워 왔고요. 다 짓고 나서는 가족에게 뿌듯한 마음이 생겼죠.

집을 허물 때 기분이 남달랐겠어요.

엄청 울었죠. 친오빠한테 미안하기도 했고요. 돌아가신 아빠의 체취와 기억이 남은 유일한 공간이잖아요. 저의 유년 시절의 추억도 있고, 엄마의 오래된 정원도 워낙 예뻐서 허물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집을 다시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50년이나 된 집이다 보니, 겨울에 정말 춥게 지내도 난방비가 50만 원씩 나왔어요. 변기도 잘 막히고 여러모로 고칠 구석이 많았죠. 수리하려고 생각하니, 이곳저곳 고치는 데만 억 단위로 돈이 드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조금 무리해 대출받아 집을 지었죠.

연이재에서 전시도 했죠? 집을 하나의 작업 과정, 작품의 질료 중 하나로 대하는 것이 느껴져요.

정확히 보셨어요. 집이 완성될 때까지 정말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는데요, 그래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제가 중심을 잡는 일이었어요. 집을 짓는다는 건 예술의 총체적 합이라 생각하거든요. 재료부터 마지막 미감까지 그 모든 과정에 제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요. 벽돌도 직접 고르고, 난간 컬러부터 인테리어의 모든 부분에 참여했어요. 그래서 집을 하나의 작품, 작품의 재료로 느끼는 듯해요.

그래도 생활공간인 집을 전시라는 공적인 공간으로 개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을 텐데요.

제가 주로 집에서 작업하잖아요. 작업실에서만 볼 수 있는 과정의 미감이 있어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도 좋아하지만 작업의 중간 과정이 정말 아름답단 말이죠. 스케치부터 그 위에 유화를 얹었을 때, 형태가 색으로 물들고, 표면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나는 순간, 그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아요. 이 순간과 만나기 위해 작업을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좋아하는 장면들이 모두 집 안에서 이루어져요. 제 작품이 가장 돋보이는 곳, 그 어떤 전시장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집이라 생각했어요.

아이들도 엄마 작업실에 종종 들어오나요?

그럼요. 작업실이 복층이잖아요. 계단에서 오르락내리락 놀기도 하고, 난간에 자석 블록을 잔뜩 붙여 놓기도 하고요. 함께 나란히 앉아 도화지에,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해요. 어느 날 아이들이 그려온 그림일기를 봤는데, 집을 그릴 때마다 그 안에 꽃이 그려져 있더라고요. 작가로 산다는 건, 제 작품이 가득 찬 공간에서 아이들이 커 나가는 걸 실감하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작업실에도 이름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르니에Grenier’예요. 프랑스어로 다락방을 뜻해요. 소설가인 지인이 지어준 이름인데요, 집을 허물기 전 반지하 작업실 시절부터 부르던 이름이에요. 마침 지금 작업실에 옥탑방이 있어, 그르니에라는 이름과 잘 맞는 것 같아요.


연이재에 살면서 작품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했나요?

저는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이전 반지하 작업실에서는 창문이 정원과 마주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작품들이 좀 더 자유롭고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 강했죠. 연이재에 살면서부터는 은유적이면서 우아한 작업을 하게 됐어요. 이곳이 특히 더 좋은 점은 빛이 잘 들어와서 늦은 오후 서향 빛이 정말 아름다워요. 제가 작업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빛과 장면이 만났을 때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해요.

집에서 작품 세계와 아이 넷을 어떻게 함께 키워 나가나요. 하루 일과가 궁금해요.

오전 6시 30분이 되면 아이들이 기계처럼 정확히 일어나요. 이불 정리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8시 30분이면 남편도 아이들도 다 출동해요. 회사에서 단축 근무를 몇 년째 쓰고 있는 남편이 출근길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거든요. 식구들 보내고 1시간 정도 집 정리를 해요. 그러고 나서, 작업실로 출근하죠. 작업실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요. 그러다 보면 남편이 오후 4시 30분에 아이들을 픽업하고, 오후 5시 30분쯤 되면 온 가족이 집에 다 모여요. 저녁은 1시간 정도 먹어요.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먹어서 식사 시간이 길어요. 그런 다음 아이들 숙제 봐주고, 딱 30분 시간을 정해놓고 운동해요. 노트북으로 영상 보며 맨손 운동도 하고 집 앞 공원 다섯 바퀴 정도 뛰기도 하고요. 아이들은 저녁 8시 정도 되면 자요. 전시 준비로 바쁠 땐 아이들 잘 때 같이 자서 새벽 3시쯤 일어나 작업하는데요. 그러면 하루 세 번 사는 느낌이에요. 아이들 깨기 전에 한 번, 기관 보내고 한 번, 하원하고 한 번. 작업이 많지 않을 땐 저도 밤 11시까지는 드라마도 좀 보고 놀다 자는 거죠.

여섯 식구의 식사 준비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할 것 같은데, 대단해요. 비결이 있을까요?

모든 게 다 시스템 아래 돌아가게 만들어요. 뭐 먹을지 고민하는 게 제일 힘들고 비효율적이잖아요. 저는 냉장고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잘 안 먹어요. 한 끼 만들어서 먹고 해치우는 게 좋죠. 자주 하는 메뉴 30가지 정도를 정해서 냉장고에 붙여놓고 아이들이 그때그때 만들어달라는 걸 해줘요. 장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봐요. 기본 식재료는 비슷하잖아요. 예를 들어 카레와 볶음밥은 재료가 같죠. 고기도 다짐육, 소고기, 돼지고기, 종류별로 소분해 놔요. 그러면 30분 안에 피자도 만들고 김밥도 말고 다 할 수 있어요.

엄청난 계획형 인간인가 봐요(웃음).

저도 이런 제가 신기해요. 제가 원래는 MBTI로 치면 P에 가깝거든요. 결정도 빠르고, 추진력도 있는 편이에요. 그런데 아이 넷을 키우며 생존형 J, 계획형이 되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내 시간과 삶을 사수할 수 없고 무너지는 거죠. 무언가를 고르고 고심하는 것도 일이잖아요.

집과 일터가 분리되지 않아서 오는 권태나 어려움은 없어요?

그게 저한테는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닌 듯해요.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일을 생각하거든요. 일을 노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노는 것도 작업 소재로 보여요.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네 아이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치우는 과정의 고단함이 저에게는 소재처럼 느껴져요.

집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아닌, 집에서 집으로 출근하는 사람에게는 일의 긴장감을 높여주는 자신만의 작업 루틴이 필요할 듯해요. 일상성이 깃든 집 모드에서 작업실 모드로 전환하는 루틴이 있을까요?

일단 작업 시작 전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조명을 켜요. 그리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책을 적어도 30분 정도는 읽고 시작해요. 그게 제가 작업자로 전환하는 어떤 과정 같은 거예요. 이런 루틴이 매일 쌓여가는 게 곧 작업이기도 하죠.

아까 잠시 보여준 크림색 아노락과 바지는 드로잉 작업복인가요?

네, 맞아요. 아빠가 생전에 입으시던 조기 축구복이에요(웃음). 작업복으로 딱 좋아요.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하나의 작업 의식 중 하나겠어요.

맞아요. 말하자면, 태세 전환이나 모드 전환을 옷으로 하는 셈이죠. 종종 작업복을 전투복이라고 불러요(웃음). 특히, 전시 기간에는 말 그대로 전투복이죠. 원래 옷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아이를 키우고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장소와 상황에 맞는 차림이라는 게 분명 존재하고, 그걸 고려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낭비이고 실용적이지 못한 태도더라고요. 옷이 곧 태도인 거죠. 갤러리 미팅 갈 때 입는 옷들은 셋업으로 몇 벌 구비해 놔요. 딱 그 선택지 안에서 이리저리 매치해 입을 수 있게요. 그리고 전시장에서는 작품과 함께 촬영할 때가 많아, 작품과 잘 어울리는 컬러의 옷을 준비하려고 해요.

육아 모드일 때의 옷도 따로 있을까요.

그럼요. 공적인 자리나 남편과 데이트할 때는 제가 진짜 좋아하는 옷을 입고,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감촉 좋은 편한 옷을 입어요. 제 옷도, 아이들 옷도 거의 면 소재만 사요. 더러운 걸 잘 못 보는 성격이라 옷을 무조건 삶아야 해서 흰 옷이 유독 많기도 하죠.

시화집 《꽃밭에 선 새벽 여행자》에 쓴 “아이의 칭얼거림이나 삼시 세끼를 차리는 번거로운 일을 달달하고 위트 있게 케이크 같은 일상으로 그려내는 일”이라는 문장이 작품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생각했어요. 일상의 피로함도 사랑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여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태도일까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요. 마티스는 해피 아트를 지향했잖아요. 물론 삶에는 힘든 일이 많지만 그건 그냥 사건 같은 거예요. 힘든 일이 있어도 크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비결이라고 한다면 육아와 그림이 서로 힘의 원천이 되는 것 같아요. 아주 힘든 육아라도 제3의 눈으로 바라본다거나, 좀 달달한 상상을 하며 아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육아가 힘들어도 재밌고 사랑스러워요. 내 사랑에 비례하는 수많은 빨래들, 엉켜서 자는 아이들, 밤새 아프다가 열이 내려 들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아이의 눈빛,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 같은 것들요. 문학적인 시선으로 제 삶을 보려고 노력하죠. 김란이라는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작업 또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고요. 전시를 끝낼 때마다 생각해요. 이건 나의 존엄의 기록이다. 김란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작업하는 마음이 커요.

처음부터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결혼식 3일 전에 첫째 임신을 알았어요. 신혼이랄 게 없이 계속 아이를 키우며 살았죠. 첫째가 진짜 낮잠을 안 자는 아이였거든요. 17년 동안 아이를 봐오신 베테랑 이모님도 애를 못 재우실 정도였죠. 광대뼈가 시릴 만큼 산후풍이 심하게 왔어요. 둘째가 생긴 것도 모르고 지냈죠. 다행인 건 첫째와 둘째가 영혼의 단짝이거든요. 어느 정도 키워 놓으니 둘이 맨날 붙어서 놀더라고요. 집도 다 지었고, 몸도 다 회복되었겠다, 남편이랑 저랑 ‘와, 이제 육아 털었다.’ 싶었죠(웃음).

그런데 쌍둥이가 생겼군요(웃음).

네, 제가 라면을 일 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은 일주일에 네 번이나 라면을 먹더래요. 남편이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싶어서 병원에 가보재서 갔더니 임신이었죠. 심지어 심장이 두 개라고. 아, 정말 많이 울었어요. 쌍둥이 임신하고 한 달을 울었죠.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어요?

그림이 없었다면 못 버텼을 거예요. 친한 언니가 제가 육아로 너무 힘들어하니까 튤립을 사다 줬어요. 그 고마운 마음을 기록으로 남겨야지 해서 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요. 저는 꽃이 막 피어났을 때보다 낙화 직전 모습이 가장 예쁘더라고요. 선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 어떤 조각 같은 모습처럼 보여요. 단순히 꽃이라기보다는 형태적으로 조각이라 불러도 될 것 같은 모습이죠. 생애 마지막으로 가장 빛나는 모습 같기도 하고요.

육아를 달달한 시선으로 바라보기까지 정말 많은 그림을 그렸겠어요.

아이들이 더 어릴 땐 밤잠을 너무 안 자서 제가 다 끼고 잤거든요. 그러니 사는 게 너무 힘들고 피폐해지고 저 자신이 없어졌죠. 저는 제 삶을 스스로 끌고 가야 하는 사람인데 끌려다니니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내공도 많이 쌓였고 깊어졌지만요. 아이들 덕분에 얻은 것도 많아요.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고독 같은 건 모르고 그저 밝게만 살았을 것 같아요. 아이를 하나 낳을수록 희로애락이 더 깊어졌어요. 아이를 키우며 작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아예 달라졌어요.

만화책과 아이스크림 같은 사랑으로

"그림으로는 좋은 것만 남기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아프고 힘든 일이 있지만 그걸 일일이 들추며 살아야 되나 싶을 때가 있어요. 저는 그냥 따뜻함으로 위로하고 싶어요.”

별명이 레이디밀크인 이유가 있을까요?

영국 유학 때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어요. 제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모유 수유를 한다고 그 친구한테 이야기해 줬더니 저를 레이디밀크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별명이 됐어요.

커리어의 시작은 패션지 아트 디자이너였죠.

네, 10년 정도 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콜라주 아트워크를 한국에 선보이기도 했고요.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 드로잉, 디자인을 하다 보니까 코로나 시대도 아니었는데 둘째까지 100% 재택근무로 일했어요. 얼굴에 철판 깔고 했죠(웃음). 그런데 아이들이 꼭 마감 기간만 되면 아프더라고요.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까 어느 날은 남편이 돈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힘들었나 봐요. 저는 저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잘 쌓아나가는 분들이 유명해지는 걸 지켜보며 결국 내 걸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고요. 그 뒤로 곰팡이 잔뜩 낀 반지하에 작업실을 만들어서 매거진 작업은 다 그만두고 개인 작업을 시작했어요.

반지하 작업실에서 드디어 ‘내 작품’을 시작했잖아요. 그때 주로 어떤 그림을 그렸어요?

정말 연년생 육아하며 죽을 만큼 힘들었거든요. 처음엔 해골의 모습을 한 제가 아기 천사 둘을 안고 있는 드로잉을 그렸는데, 양가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희생도 있지만 사랑도 있는 게 육아인데 희생만 보이는 거죠. 그래서 얼굴을 하트로 바꿨더니 딱 제가 원하던 유쾌한 감정이 담기더라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유쾌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거다!’ 싶었죠. 그 뒤로 하트 얼굴을 더 늘렸고, 그렇게 엄마 시리즈를 시작했죠. 처음보다 그림 실력도 많이 늘고 스타일도 바뀌었어요. 저는 지금도 제 스타일이 100% 완성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가 제 작품을 카피하더라도 신경 안 쓰는 편이에요. 작가의 전체적인 흐름이 중요할 뿐이죠. 그래서 매번 전시가 끝나면 집에 걸어놓고 계속 지켜보며 연구해요. 액자 프레임까지 직접 제작하고, 같이 일하는 분들과 그에 대해 토론하죠.

아트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이 회화 작가로 활동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나요? 그때 경험을 통해 배운 점이 있나요?

디자인은 일단 서체가 기본이에요. 서체와 서체의 간격을 볼 줄 아는 눈이 그때 경험으로 생겼죠. 조형적인 감각도 많이 키워졌고요. 그래서 제 작업이 조형적이라는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나 봐요. 그때 콜라주 작업 정말 많이 했거든요. 요즘도 매거진들과 종종 작업해요. 그렇게 한 작업으로 전시 비용을 대기도 하고, 아이들 키우는 비용을 살짝 벌기도 하고요.

꽃 그림들을 보면 뒤돌아보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해요. 뒤돌아보지 않는 단단한 사람 맞아요. 과거가 크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에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죠. 딱히 미래를 크게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미래의 나한테 맡겨야지.’라는 생각으로 버텨요. 왜냐하면 경험은 계속 쌓이니까 지금의 나보다 미래의 내가 나을 거거든요. 그저 현실에 충실하게 사는 게 제일 재밌는 듯해요.

가장 좋아하는 꽃은 뭐예요?

하얀 튤립이요. 제가 왜 이렇게 흰색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봤거든요. 빛이 떨어질 때 명암의 차이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빛의 단차가 생기면서 명암과 조도가 바뀌는 형태가 아름다워서 하얀색 꽃만 찾게 돼요. 그중에서도 약간 푸른빛이 도는 깨끗한 흰색을 가장 좋아해요.

작가로서 절대 하지 않는 원칙 같은 것이 있을까요?

기분이 좋을 때만 그림을 그리려 해요. 좋은 기운을 담으려고 노력하죠. 그림은 직관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림으로는 좋은 것만 남기고 싶어요. 누구에게나 아프고 힘든 일이 있지만 그걸 일일이 들추며 살아야 되나 싶을 때가 있어요. 저는 그냥 따뜻함으로 위로하고 싶어요. 피학성이 보이는 작품이나 어두운 것들을 아이들이 사는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에게는 좋은 것, 따뜻한 사랑만 남겨주고 싶어요.

그림과 달리 시에서는 밤사이 뒤척임과 불안함이 보이기도 해요.

글은 그림과 달리 펼쳐서 읽어봐야 하잖아요. 슬프거나 힘든 일은 글로 풀어내요. 글은 그림과 달리 좋은 것만 남기려 하지 않죠. 육아하면서 10년 가까이 잠을 제대로 잔 적이 거의 없어요. 아이들과 같이 자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그런 뒤척임 같은 게 글로 남겨져 있어요.

글을 쓰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나요?

작업하기 전에 30분씩 꼭 책을 읽는다 했잖아요. 읽다 보면 글을 쓰고 싶은 순간이 오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조금씩 쓴 글을 모아 시화집을 내게 됐죠. 시와 회화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으로 시를 썼을 때 폴란드 시인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에게 완전 빠져서 매일같이 시를 찾아 읽었어요. 심보르스카의 시에는 단어가 정확하게 들어가 있거든요. 정확히 그 단어일 수밖에 없는 단어들이 적확한 위치에 배치돼 있어요. 그림이 물감을 갖고 노는 것이라면 시는 언어와 단어를 갖고 노는 행위라 생각해요. 그래서 시를 좋아해요. 그림과 비슷해서요. 처음엔 주변으로부터 글보다 그림이 더 좋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계속 썼어요. 저는 주변 사람 크게 신경 안 쓰고 제가 원하는 대로 사는 편이거든요. 말하자면 외적 동기보다 내적 동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림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의 원천이 바로 그 내적 동기인가 봐요.

작가 생활은 돈을 생각하면 쉽지 않거든요. 전시 준비하는 비용 대비 작품이 굉장히 많이 팔리지 않는 한 힘든 생활이에요. 다행히 저는 운이 좋아서 제 작품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거죠. 판매나 비용적인 외적 동기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스트레스만 쌓이죠. 그래서 내적 동기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가고자 하는 길을 걸을 수 있어요. 아이들에게 사랑을 남겨주고 싶다는 내적 동기로 시작한 작업인데 감사하게도 제 작품을 보며 우는 팬들도 생겼어요. 그런 분들을 만나면 저도 덩달아 울어요. 아이 넷을 키우며 작가 생활하는 게 힘들어도 놓치지 않고 꾸준히 걸었더니 이런 행복한 순간을 만나는구나 싶어 감사할 뿐이죠.

가장 최근에 강렬한 영감을 받은 순간은 언제예요?

엄마가 양평에서 분재원을 하시는데요, 뒤편에 산이 있어요. 처음엔 잡초로만 무성한 산이었는데 엄마가 3년 정도 잡초를 뽑고 계절마다 돌보면서 지금은 아름다운 정원이 됐어요. 나비도 날아다니고, 밤도 떨어지고, 감도 주렁주렁 열린 그곳에서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워요. 나중에 세월이 지나 봤을 때도 그 순간과 추억에 다시 빠져들 수 있게 그림으로 남기고 싶단 생각을 하죠.

그런 영감이 날아가기 전에 포착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잽싸게 아이폰 메모장을 열어서 막 적어요. 적을 시간이 없다면 비디오 녹화를 켜놓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 다음 조금 더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글을 정리할 때가 있어요. 어떤 날은 그림을 그리다가 감정이 벅차올라 작품 제목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영감은 언제 어디서 올지 몰라요. 그저 기다릴 뿐이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린 시절엔 어떤 아이였을지 궁금해져요.

만화책을 정말 많이 봤어요. 책방에서 만화책, 판타지 소설 다 읽고 더 읽을 게 없으면 다른 책방으로 넘어가곤 했죠. 생활력이 강해서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기도 하고요. 중학생 때는 KFC에서 2년 정도 아르바이트하다가 나중에는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하는 매니저까지 했어요. 생각해 보니 정말 자유롭게 컸네요. 공부는 많이 안 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공부했어요. 운 좋게 수능이라는 시스템이랑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아이들이랑 만화책 많이 봐요.

어릴 적 집에 대한 기억은 어때요?

삼성동 주택에서 살았는데 학교와 5분 거리여서 우리 집이 친구들 아지트였어요. 장미 정원이 있는 집으로 유명해서 엄마가 항상 대문을 열어 놨거든요. 그러면 지나가던 동네 분들이 들어와 구경하시기도 했고, 친구들이 학교 끝나고 다 몰려와 제가 없어도 집에서 놀다 갔어요. 냉장고에서 음식도 꺼내다 먹고요. 그래서 집은 자유롭고 편안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분재 작가인 어머니와 협업을 하기도 했죠. 어머니가 김치통에 꽃을 넣어 보내주신다면서요. 어린 시절 이런 풍경을 상상한 적 있나요?

전혀요. 제 어릴 적 꿈은 한비야였어요. 아빠가 제가 생후 두 달 되었을 때 저를 가방에 넣어 머리만 내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실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신 분이었거든요. 아빠처럼 전 세계를 다니는 게 제 꿈이었어요. 지금은 작가 생활하는 게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제 나름대로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가는 거죠.

작업복을 입을 때마다, 거실의 소파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르겠어요.

에이, 아빠도 저 위에서 잘 지내고 계시겠죠(웃음). 한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둘째가 캔 음료수를 막내한테 줬다가 막내 손이 캔에 찢어졌어요. 남편이 막 소리 지르고 다들 놀라서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문득 둘째가 안쓰러운 거예요. 다친 막내도 안쓰럽지만 둘째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동생이 그렇게 다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을 거 아니에요. 그때 문득 아빠 생각이 나더라고요. 제가 중학생 때 말괄량이처럼 엄청 거칠게 놀았거든요. 3층에서 놀다가 떨어진 적이 있는데, 인대가 파열되고 6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때 아빠가 병원에 매일 같이 아이스크림이랑 만화책을 갖고 온 거예요. 그게 무척이나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아픈 건 전혀 생각 안 나고, 아빠의 아이스크림과 만화책만 기억나요. 그래서 지금도 만화책과 아이스크림 같은 걸 그리려고 하죠. 아빠의 사랑은 제게 그런 거예요.

요즘은 어떤 꿈을 꾸나요?

저의 여러 꿈 중 제일 큰 꿈이라고 한다면 해외 전시예요. 여행을 좋아하시던 아빠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하고 전시하며 살고 싶어요. 아이들 좀 크면 아이슬란드부터 갈 거예요. 사실, 아이 둘만 있었을 땐 이제 집도 지었고 어느 정도 주거 안정이 됐으니 작가로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도 마음 편히 작가 생활 할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두 명이 더 태어나니 상황이 완전 달라졌어요. 진짜로 여행 갈 돈이 없는 거죠. 여섯 식구 비행기 값만 해도 만만치 않잖아요.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죠. 참, 얼마 전에는 100억이 생기면 무얼 할지 상상을 해봤어요(웃음). 상상 속의 저는 큰 작업실을 짓고 있더라고요. 나는 작가 생활은 포기 못 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죠.

오전에 만나 벌써 늦은 오후가 되었네요. 작업실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직접 보게 되어 기뻐요.

이제 아이들과 남편이 올 시간이 되었네요. 간식을 좀 준비해야겠어요(웃음).

070-4150-2017

wee.enough@gmail.com

Terms of Use

Privacy Policy

(주)위아이너프 | 대표 김현지 

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2마길 14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김현지 

사업자번호 439-86-03136 

통신판매업신고 2024-서울서대문-0387

COPYRIGHT  Ⓒ 2024 wee 
ALL RIGHTS RESERVED

(주)위아이너프

대표 김현지

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2마길 14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김현지
사업자번호 439-86-03136
통신판매업신고 2024-서울서대문-0387

Copyright  2024 wee All Rights Reserved

카카오톡 채널 채팅하기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