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1 CLOTHES

한 벌의 옷을 입는 일에 대하여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김이경

4년 뒤에 동전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읽었다. ‘동전 없는 사회’가 오리라는 전망은, 그해가 2020년이라는 사실만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공상과학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시대가 도래하면, 우리는 동전을 잃는다. 찰랑이는 동근 것들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다가 헤아리는 재미를 잃고, ‘동전의 양면’이라는 적합한 표현을 잃고, 저금통에 모아둔 작은 바람을 잃는다.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동전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굳이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가상계좌를 통해 처리하는 시스템이 상용화된 요즘, 이 ‘효율적인’ 결정이 얼마나 큰 편의를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역사를 담은 물건이 사라진다는 건 여러모로 씁쓸한 일이다. 이쯤 되면 비슷한 운명에 처하지 않을 것들을 애써 찾게 된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에 우리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체할 수 없는 쓸모를 지닌 물건들, 그중 하나는 단연 ‘옷’이다. 본래 가리고 보호하는 역할이 있건만, 숨기면서 드러내는 데도 그만한 것이 없다. 완전무결한 존재로 이 세상에 온 벌거숭이가 접하는 가장 세속적인 물건이기도 하다. 아기가 옷의 역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시절을 거쳤으나 기억나지 않으니 더 신비롭다), 어른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빨리, 어쩌면 마법처럼, 자주 변하는 건 분명하다. 그들의 옷이란 때때로 용왕이고, 꿀벌이고, 나무가 된다. 아이 옷을 만드는 작업이 특별한 이유는 옷의 쓸모와 아이의 취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대체로 이 두 세계는 맞닿아 있지 않다. 모자를 겹쳐 쓰고, 양말을 한쪽만 신고, 바지에 양팔을 넣고 싶은 아이들과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어른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주 가끔 마음이 맞을 때도 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을 늘어진 양말에 넣는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옷을 독특하게 매치하거나 색을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아직 마음에 아이가 있구나, 하고 부러움을 느낀다. 변화무쌍한 트렌드를 반영하고 그만큼 빠르게 소비되는 요즘, 매일 새롭고 멋진 옷들이 쏟아진다.

예전처럼 물려 입거나 만들어 입는 일은 줄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옷장 한 켠에 아껴두거나 버리지 못한 옷이 있다. 새것이든 헌것이든 각자의 위치에서 유효하다. 다만 조금 더 마음이 쓰이는 쪽은 후자다. 세월을 초월한, 쓸모나 효용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 어디쯤 안착해 되레 없으면 허전한 것들. 번역가이자 수필가이기 전에 한 아이의 엄마였던 전혜린의 육아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도 어렸을 때 엄마가 장미를 수놓아서 만들어준 원피스의 양 어깨에 달았던 붉은 공단 리본의 한쪽을 언제까지나 서랍 속에 넣어서 아껴두었다’고. 60년간 ‘색’을 연구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역시 오래된 기억을 꺼낼 때 의복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세한 사연은 그의 저서 《우리 기억 속의 색》에서 풀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다섯 살 꼬마였을 때 집에 놀러 온 아버지의 벗이자 초현실주의 작가였던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노란 조끼, 사춘기 시절 내내 마음에 두었던 감색 블레이저, 몸에 직접 닿는 속옷에 대한 견해 같은 것들인데, 한 사람을 둘러싼 세계가 색색의 옷을 갈아입고 흥미롭게 이어진다. 국민학생 시절, ‘아버지의 날’ 행사가 있었다. 친구들은 목을 길게 빼고 운동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연신 손을 흔들며 우쭐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뒤에서 기웃대던 나는 구경꾼이었다. 늘 훈련과 경기로 바쁜 아빠가 행사에 참석하리라는 기대는 아예 접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득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놀람과 반가움에 앗, 하고 소리 질렀다. 친구들은 그런 나와 아빠를 번갈아 보며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 아빠는 왜 저런 옷을 입고 오셨냐”라고. 그렇다, 평생 운동을 하고 체육을 가르쳐온 아빠는 파란색 추리닝 한 벌을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수놓은 운동복이었는데, 늘어지는 부분 없이 몸에 착 감기는 도톰한 소재로 평소 그가 아끼던 옷이었다. 내겐 익숙한 출근 복장이었지만 친구들에게는 생경한 모습이었다.

운동복과 챙이 있는 모자, 하얀 양말에 운동화라니. 그 순간부터 양복을 차려 입은 다른 아버지들보다 추리닝 차림의 아빠가 덜 멋져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아빠가 어디쯤 있는지 찾을 때라던가… 남들과 다르다는 게 궁금하면서도 신경 쓰이는 나이, 한동안 왜 양복을 입지 않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파란색 추리닝은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걸. 올해 정년퇴직을 앞둔 아빠가 말쑥한 정장을 입고 마지막 출근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평소 모습 그대로도 멋지니까.

옷은 개인의 역사다. 줄무늬 셔츠를 좋아하는 친구, 청바지를 입은 그때 그 배우, 보라색 스웨터를 뜨는 엄마. 어떤 옷을 보며 특정한 사람을 떠올리는 건 촘촘히 엮인 그물에 누군가의 시간과 이야기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제복, 성직자의 옷, 신부의 웨딩드레스처럼 오랫동안 관행이 된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옷은 저마다의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흔히 옷을 지칭할 때 쓰는 ‘Textile(옷감)’과 ‘Texture(질감)’라는 단어를 들여다보면 의외의 문자가 숨어있다. 모든 형태의 글을 뜻하는 ‘Text’인데, ‘짜다, 엮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Textum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옷을 골라 입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일상의 면면이 드러나는 걸 보면 우연은 아닌 듯하다. 그렇게 짜이고 엮인 것들은 결국 대체할 수 없는 기억, 사라지지 않을 역사가 된다. 마치 한 권의 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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