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으로
오후를 채우던 아이
90년대 중·후반, 한창 개발 중이던 우리 동네는 신도시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키 작은 다세대 주택들이 빽빽하던 곳은 널따란 아파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이곳저곳 새 빌딩을 기다리는 빈 공터가 많았다. 평화, 대동, 태평 같은 거국적인 이름을 가진 아파트 사이로 신식 초등학교들이 완공을 다 끝내지 못하고 문을 열었고, 부족한 교실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아이들을 반겼다.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되던 초입, 이웃과의 문턱은 지금에 비해 몹시 낮아서 주민끼리 많은 것을 나누었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가족들 대부분은 외벌이였다. 직장인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가 당시의 표준치인 것처럼 흔했다. 그 사이에서 우리 집은 맞벌이였다. 물론 신발이나 옷을 파는 일을 하는 어머니들이 종종 있었지만 우리 엄마처럼 회사에 소속돼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말을 다시 하자면, 집에 혼자 남은 어린 여자애와 함께 있어줄 어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당시 우리 집의 흔한 풍경은 반들반들한 장판 위로 아무도 없는 텅 빈 거실이었으니.
홀로 버텨야 하는 시간이 나름 빠르게 흘러가도록 도와준 건 장난감이었다. 머리를 염색할 수 있는 미미 인형, 눕히고 세울 때 눈을 감고 뜨는 똘똘이(이 인형 사준다고 해서 따라 나갔다가 치과에 갔었다), 인형용 포대기와 유모차, 소꿉놀이 세트, 종이 인형들. 혼자 여러 연기도 했다. 화가 난 엄마가 되었다가, 용서를 비는 딸도 되고, 게으른 가게 점원이거나 까다로운 손님이기도 했다. 날마다 놀이에 참여하는 장난감의 개수만큼 연기하는 인물의 수도 늘어났다. 후에 어른이 되어 안 거지만, 장난감이랑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뒤로 하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일터로 향한 엄마는 길거리에서 애기 울음소리만 들리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몰래 울었다고 했다. 어린 나는 차마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마 장난감이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어른인 엄마는 알았을 것이다. 많은 것이 발전하고 개발되고 있는 와중에 어른의 부재를 장난감이 채워주던 시절이었다. 나의 오후는 그렇게 흘렀던 것 같다.
민들레. 내 애착 인형의 이름은 민들레였다. 노란 곰이었는데 털이 내 곱슬머리처럼 꼬불꼬불했다. 아직도 나는 엄마의 부재가 두려움이나 공포로 다가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모습으로 추측하건대 내가 흘려보낸 오후들이 마냥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아니었던 듯싶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내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온,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부분으로 남은 것처럼. 그리고 그럴 때면 민들레를 푹 안고 싶어진다.
“They mean a lot, to me.” <토이 스토리3>에서 앤디가 말했다. 나는 작별을 하는 앤디와 우디를 보고 펑펑 울었다. 장난감이 아이의 모든 것을 대신해줄 수는 없겠지만, 마주한 두려움을 ‘별 게 아니야’라고 외면할 수 있게끔 도와준 건 맞다. 분명 혼자 있는 게 두려웠을 거다. 하지만 두려움에 집중하지 않게, 그래서 진짜 공포처럼 다가오지 않게 해준 게 장난감이기도 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