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빈
게스트 하우스 강류재 대표
바비언니
저녁 먹으라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아파트 단지를 왕왕 울릴 때까지, 꼬질꼬질한 얼굴 위로 땀 삐질 흘리며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있었지요. 정강이 무릎 팔꿈치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험하게도 뒹굴었더랬어요. 헌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 활기찼던 날들 사이사이, 방정맞은 기억의 틈새에 참으로 얌전한 추억들도 조용히 떠오르는 거라 거기서 나 오랜만에 언니를 봤어요. 쭉쭉 빵빵한 몸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푸른 눈, 구불구불 사방으로 뻗친 백금발 머리까지 그때만 해도 참 낯선 이국의 얼굴이라 이제 와 말하지만 사실 난 언니 예쁜지 잘 몰랐다오. 검은 눈에 동글동글 부드러운 이목구비의 ‘미미’가 더 예뻤던 것 같은데….
그래도 언니 그 날씬한 허리띠를 꽉 귀고 찍은 사진이 여기저기 많은 것을 보면, 내가 언니 참 좋아하긴 했던 모양이오. 그래 확실히 듬성듬성 숨어 있는 기억들을 더듬어 보면 게 중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어요. 예쁜 색깔이지만 부스스하고 뻣뻣해서 빗질하기 영 힘들었던 그 머리칼. 왜인지 안쪽이 푸른색이었던 늘씬한 다리가 볼 때마다 신기했던 어린 나(지금 생각해보니 스타킹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언니랑 놀 때 늘 곁에 있던 내 어린 날의 단짝 친구 바비언니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그 시절 나를 이루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 선명하게 빛났다 사라집니다.
바비 언니,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은 빛바래 흩어진 지 오래고, 땀 냄새 풍기며 뛰놀던 동네는 재건축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동네 뒷산에 오를 때도 손 꼭 잡고 함께 했던 언니는, 내 유년 시절의 모든 보물들이 그러했듯이, 깨달은 순간 이미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게 되었지요. 그럼에도 쓸쓸한 만큼 사랑스러운 여정이었습니다. 이미 마흔은 훌쩍 넘었을 언니 모습이 문득 궁금해지네요.어느 문학가의 마들렌 한 입처럼, 나를 찬란하게 빛났던 그 시간으로 데려다준 푸른 다리의 내 옛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