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을 열었다가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결이 어제와 다르다든가, 짧은 산책길에 운동화 속 맨발이 더워지는 속도가 빨라졌다거나. 왈칵 불어닥친 찬바람이 입안에서 서걱서걱 첫서리 맛을 낸다거나. 솜털을 보송보송 말리며 통통하게 살찌워가는 나뭇가지 새 눈을 여럿 발견했을 때. 계절이 달력의 숫자 따라 똑딱똑딱 끊어 걷는 것이 아니라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처럼 날이 날에게 잇닿고 잇닿아 서로에게 물들고 물들어 결국 동그라미를 그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치고 만다. 계절과 계절이 잇닿아가는 어느 틈. 불현듯 이때다 싶은 그 날, 엄마들은 서랍과 장을 열어젖히고 앉아 옷 더미 앞에서 몇 시간씩 계절 갈이를 한다.
우리 집에는 일곱 살과 네 살이 산다. 일곱 살의 여름을 차곡차곡 개켜 넣으며 지난 여섯 살의 가을 겨울을 꺼내놓고 일곱 살의 가을 겨울에 이어 입을 것이 있는지 녀석의 팔다리 길이와 몸 품을 가늠해가며 한 장 한 장 펼쳐본다. 다 큰 사람이야 살이 조금 더 붙거나 빠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수고는 필요 없이 긴 것 짧은 것 더 이상은 손이 안 가 그만 입을 것만 나누어놓으면 된다지만 나날 몸이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주 과업인 아이들의 옷 정리에는 이렇게 낱낱의 수고로운 손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조금 큰 채로 입던 도톰한 티셔츠는 올 겨울 녀석에게 딱 예쁘게 맞겠다. 니트 몇은 소매는 짧지만 품이 넉넉하니 셔츠와 겹입어 이어가면 되겠다. 아 그런데 바지들은 쑥 길이를 늘인 녀석의 다리 발목으로부터도 한참 위에서 짤랑대서 아무래도 웃기겠다. 옷마다 세세한 코멘트를 달아가느라 정리하는 손길이 더 더디다. 일곱 살에게 작아진 옷 중에 네 살이 물려 입을 것을 고르는 일도 더해진다. 터울이 있으니 바로 이어줄 수 있는 것은 사실 많지 않다. 마음에 꼭 들어서 일곱 살에게는 작은 줄 알면서도 입히던 것이 네 살에게는 조금 크게 입히는 정도가 된다.
바지는 두 번을 걷어 입히게 되는 일도 있는데 영락없이 형 옷 물려 입은 차림을 하게 되는 둘째 녀석에게 그래서 짠한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그마저도 귀여움으로 승화하는 나이가 바로 네 살이지 싶다. 아이보리색 꽈배기니트는 브이로 파진 목 부분에 코발트색으로 두 줄이 그려져 스쿨룩의 대명사 같은 느낌인데 좋은 날마다 셔츠에 겹쳐 두 녀석 단골 외출복으로 입혔다. 좋은 날, 좋은 식당에 외식하러 갈 때도 입혔고 크리스마스 즈음 예쁜 공간에 꽃 수업을 받으러 갈 때도 또 사진 찍을 일이 있을 때도 두 녀석을 쌍둥이처럼 꼭 같은 모양으로 입혔다. 늘씬하게 키만 키운 일곱 살에게는 한 해 더 입힐 만하겠는데 쑥쑥 통통하게 자라난 네 살에게 더는 안 맞겠구나 싶어 서운한 생각이 든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다.
일곱 살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개나리색 가디건은 녀석이 유치원 친구들 앞에 서서 발표를 하는 날에도 입혔다. 하루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하는 간단한 발표로 자신감을 심어주시려고 만든 행사였는데 발표를 잘 마치고 나면 선생님께서 ‘참 잘했어요’ 배지를 가슴에 달아주셨다. 발표날 아침 나는 그 노란 가디건을 꺼내 녀석에게 입혀주었다. 소매를 판판하게 펴주고 단추 하나하나 단단히 여물어주며 씩씩하게 잘하고 오라는 말 대신 녀석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디션 속 아이의 얼굴에서 엄마의 응원을 읽은 것은 아마 나도 같은 순간을 겪었기 때문인 것 같다. 녀석이 하원 차에서 내릴 때 노란 가디건 가슴에 달린 칭찬 배지를 들어 보이며해사하게 웃던 그 순간을 나는 내내 잊지 못하고 있다.
아, 그런데 이 가디건도 소매며 주머니에 보풀이 너무 돋아 이제 그만 입혀야겠구나 싶어 서운한 마음에 펴든 채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옷에 담긴 세세한 사연들을 읽어가며, 이어갈 계절 따라 얇은 긴 것 덧입을 것 도톰한 긴 것 순으로 손날을 세워 착착 개켜나간다. 이것들로 차곡차곡 서랍과 장을 채우면 계절 갈이가 얼추 완성된다. 서랍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에 덜어놓은 미에서 우리 집 아이들보다 더 작은 아이들에게 물려줄 옷을 찾는 게 그다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