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vol.1 CLOTHES

한 벌의 옷을 입는 일에 대하여 

글·사진  김수경

몇 년 전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아이를 인상 깊게 본 일이 있다. 잘생겼다거나 예쁘장하다는 말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동글동글한 얼굴과 작은 눈 코 입이 귀여운 친구였는데 인상 깊은 것은 매번 나올 때마다 옷을 아주 예쁘게 잘 입는다는 점이었다. 오디션의 끝자락에 가까워져 참가자가 몇 남지 않게 되면 전문적인 스타일링을 받으니 눈에 띄게 세련돼진다지만, 오디션 초반에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입고 꾸미고 나와 대부분 수더분한 와중에도 이 친구만큼은 눈에 띄었다. 색과 무늬를 신경 써서 매는 나비넥타이와 발목에 알맞게 떨어지는 바지 길이감 같은 것은 매만져주는 손길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지 않나 싶었다. 나만 그렇게 본 것이 아니었는지 결국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노래를 듣기 전에 “그런데 누가 이렇게 옷을 예쁘게 입혀주세요?” 하고 물었다. 옷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의도가 그랬다면 어쨌거나 성공적이었다.
“엄마요, 엄마께서 입혀주세요.” 하는 아이의 얼굴이 맑아지면서 얼어서 더 작아진 눈 코 입이 제 크기로 돌아가더니 이내 웃음과 함께 확 피어났다. 그렇게 긴장을 내리고 멋지게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보면서 옷장을 열어놓고 옷을 고르느라 한참을 서있는 그 모습을, 다리미에 손목 힘을 주어가며 빳빳하게 셔츠 깃을 새우거나 바짓단과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겨 판판하게 펴주는 손길을, 잘하고 오라는 말 대신에 어깨와 등판을 툭툭 털며 마무리하는 그 아이의 엄마를 보고 말았다. 아이는 예쁜 옷이 아니라 엄마의 응원을 입고 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옷장의 

계절 갈이 

아침에 창을 열었다가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람결이 어제와 다르다든가, 짧은 산책길에 운동화 속 맨발이 더워지는 속도가 빨라졌다거나. 왈칵 불어닥친 찬바람이 입안에서 서걱서걱 첫서리 맛을 낸다거나. 솜털을 보송보송 말리며 통통하게 살찌워가는 나뭇가지 새 눈을 여럿 발견했을 때. 계절이 달력의 숫자 따라 똑딱똑딱 끊어 걷는 것이 아니라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처럼 날이 날에게 잇닿고 잇닿아 서로에게 물들고 물들어 결국 동그라미를 그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치고 만다. 계절과 계절이 잇닿아가는 어느 틈. 불현듯 이때다 싶은 그 날, 엄마들은 서랍과 장을 열어젖히고 앉아 옷 더미 앞에서 몇 시간씩 계절 갈이를 한다.

우리 집에는 일곱 살과 네 살이 산다. 일곱 살의 여름을 차곡차곡 개켜 넣으며 지난 여섯 살의 가을 겨울을 꺼내놓고 일곱 살의 가을 겨울에 이어 입을 것이 있는지 녀석의 팔다리 길이와 몸 품을 가늠해가며 한 장 한 장 펼쳐본다. 다 큰 사람이야 살이 조금 더 붙거나 빠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수고는 필요 없이 긴 것 짧은 것 더 이상은 손이 안 가 그만 입을 것만 나누어놓으면 된다지만 나날 몸이 길어지고 늘어나는 것이 주 과업인 아이들의 옷 정리에는 이렇게 낱낱의 수고로운 손길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조금 큰 채로 입던 도톰한 티셔츠는 올 겨울 녀석에게 딱 예쁘게 맞겠다. 니트 몇은 소매는 짧지만 품이 넉넉하니 셔츠와 겹입어 이어가면 되겠다. 아 그런데 바지들은 쑥 길이를 늘인 녀석의 다리 발목으로부터도 한참 위에서 짤랑대서 아무래도 웃기겠다. 옷마다 세세한 코멘트를 달아가느라 정리하는 손길이 더 더디다. 일곱 살에게 작아진 옷 중에 네 살이 물려 입을 것을 고르는 일도 더해진다. 터울이 있으니 바로 이어줄 수 있는 것은 사실 많지 않다. 마음에 꼭 들어서 일곱 살에게는 작은 줄 알면서도 입히던 것이 네 살에게는 조금 크게 입히는 정도가 된다.

바지는 두 번을 걷어 입히게 되는 일도 있는데 영락없이 형 옷 물려 입은 차림을 하게 되는 둘째 녀석에게 그래서 짠한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그마저도 귀여움으로 승화하는 나이가 바로 네 살이지 싶다. 아이보리색 꽈배기니트는 브이로 파진 목 부분에 코발트색으로 두 줄이 그려져 스쿨룩의 대명사 같은 느낌인데 좋은 날마다 셔츠에 겹쳐 두 녀석 단골 외출복으로 입혔다. 좋은 날, 좋은 식당에 외식하러 갈 때도 입혔고 크리스마스 즈음 예쁜 공간에 꽃 수업을 받으러 갈 때도 또 사진 찍을 일이 있을 때도 두 녀석을 쌍둥이처럼 꼭 같은 모양으로 입혔다. 늘씬하게 키만 키운 일곱 살에게는 한 해 더 입힐 만하겠는데 쑥쑥 통통하게 자라난 네 살에게 더는 안 맞겠구나 싶어 서운한 생각이 든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다.

일곱 살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개나리색 가디건은 녀석이 유치원 친구들 앞에 서서 발표를 하는 날에도 입혔다. 하루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하는 간단한 발표로 자신감을 심어주시려고 만든 행사였는데 발표를 잘 마치고 나면 선생님께서 ‘참 잘했어요’ 배지를 가슴에 달아주셨다. 발표날 아침 나는 그 노란 가디건을 꺼내 녀석에게 입혀주었다. 소매를 판판하게 펴주고 단추 하나하나 단단히 여물어주며 씩씩하게 잘하고 오라는 말 대신 녀석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디션 속 아이의 얼굴에서 엄마의 응원을 읽은 것은 아마 나도 같은 순간을 겪었기 때문인 것 같다. 녀석이 하원 차에서 내릴 때 노란 가디건 가슴에 달린 칭찬 배지를 들어 보이며해사하게 웃던 그 순간을 나는 내내 잊지 못하고 있다.

아, 그런데 이 가디건도 소매며 주머니에 보풀이 너무 돋아 이제 그만 입혀야겠구나 싶어 서운한 마음에 펴든 채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옷에 담긴 세세한 사연들을 읽어가며, 이어갈 계절 따라 얇은 긴 것 덧입을 것 도톰한 긴 것 순으로 손날을 세워 착착 개켜나간다. 이것들로 차곡차곡 서랍과 장을 채우면 계절 갈이가 얼추 완성된다. 서랍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에 덜어놓은 미에서 우리 집 아이들보다 더 작은 아이들에게 물려줄 옷을 찾는 게 그다음 일이다.

치수를 잘 못 맞추거나 계절이 애매해 몇 번 못 입은 것들 예쁘게 잘 입던 옷이라 버리기 서운한 것들이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데 이것 역시 물려줄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추려나가는 일이어서 공을 들인다. 우리 집 아이들도 사촌 형아 들에게나 이웃에 사는 형들에게 옷을 많이 물려 입으며 자랐다. 묻혀가며 먹고 토하고 침 흘리는 것이 일인 아가는 하루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무늬고 색이고 상관없이 보드라운 면으로 된 것이면 무엇이나 좋았는데 형광물질이나 표백성분처럼 말 많고 탈 많은 요즘 같은 때에 여러 번 입고 빨아 날긋해진 것이 오히려 걱정 없이 입히기 좋았다.

놀이터에서 엉덩이가 새까매지도록 미끄럼을 타거나 토마토 국물을 줄줄 흘려가며 티셔츠 앞자락을 적셔도 내게는 아주 든든히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형들이 물려준 이른바 ‘막 입힐 수’ 있는 물림 옷들이었다. 내가 그랬기에 일곱 살과 네 살이 잘 입던 옷들과 새것이나 다름없는 옷들을 추려 네 살 난 아들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아가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아가가 입을 것이니 깨끗하게 새로 삶고 빨아 손질해서 보냈는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우리 집 두 아이의 좋은 기운까지 물려받은 것 같다며 좋아해주고 너무 잘 입혀주어서 내 쪽에서 더 많이 고마웠다.

그녀의 말을 계기로 물려준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단순하게 작아진 옷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지난 좋은 날과 좋은 생각을 함께 담아 선물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려 입을 아이와 아이의 엄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싶다. 세탁해서 서랍에 넣어둔 옷들이지만 보낼 것을 추리고 나면 새로 빨아 기분 좋은 냄새까지 함께 포장해두는 것으로 계절 갈이를 마무리한다. 우리 집 아이들이 예쁘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고 바라던 마음이 물림 옷으로 전해져 다음 아이에게로 또 그다음 아이에게로 이어져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들은 물려받은 옷을 입으며 건강하게 함께 자라난 것이지 않을까 하고.

작고 낡고 헛헛한 것을 비우고 


배냇저고리를 남기다 

작은 집에 살게 되면서부터 되도록 짐을 많이 늘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꼭 필요한 것들만 적게 가지고 반들반들 닦아 아껴가며 간소하게 살고 싶지만 두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늘 단정한 살림을 꾸려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 씻기고 입히고 먹여 재우는 매일의 일과 속에서 우선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만 잠깐씩 치우며 살다 보면 어느새 군살처럼 늘어나 붙어있는 것이 살림살이였다.

작은 집에서 옷 방이라 불리는 공간 하나는 네 식구의 옷과 여분의 침구, 늘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물건들(이를테면 다리미나 안마기 선풍기와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것들)을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자는 곳 아이들 책 읽고 노는 곳 네 식구 먹고 마시는 곳처럼 매일매일 꼭 필요한 쓰임이 있는 공간은 잠깐씩이라도 손길이 닿으니 그나마 깔끔한 상태로 지켜나가고 있지만, 짐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이 옷 방에 모여 모르는 척 게으름이 쌓일 때마다 빠른 속도로 살을 불렸다.

깊고 넓은 여섯 개의 서랍이 있는 장에 아이들 옷을 넣어두었는데 네 살이 드디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외출복이 꽤 늘어나 결국 옷이 포화상태가 되어버렸다. 분명 가운데 서랍을 열었는데 도톰하게 말아 넣은 옷에 걸려 아래 서랍이 같이 딸려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이 군살을 더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겠구나 싶었다. 하루는 아예 좌정을 하고 서랍을 죄다 엎었다. 버릴 것 물려줄 것을 추려내니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앞으로 더 불어날 것을 생각해 신혼부터 이모저모로 사용해 온 서랍장 하나를 더 비워내기로 했다.

오래도록 열어보지 못한 서랍에서 나온 것은 필름이 담긴 신발상자였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를 갓 만난 때이니 스물다섯 즈음이다. 그때 십육만 원이라는 생애 가장 큰 지불을 하고는 중고 필름카메라를 하나 샀다. 언제 어디를 가든지 내 왼 어깨의 조금 내려앉은 각도와 당연한 듯한 무게를 담당하던 녀석이다. 그때부터 찍은 필름들을 신발상자에 차곡차곡 모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웃었다 쨍그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는 예쁜 아이의 모습을 바쁜 육아 틈틈이 담아주고 싶은 엄마는 초점을 맞추고 빛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 카메라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렇게 더 이상 필름을 갈아 끼우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된 것이 꽤 오래전 일이다. 이 작은 집에 정착하기까지 세 번의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정리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을 텐데 마음이 먹어지질 않아 보류 상태로 쌓아둔 것이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다른 한 가지는 아이들 배냇저고리다. 분명히 깨끗하게 빨아 넣었는데도 작은 목둘레가 누렇게 변해있다. 조금 세게 얼렀다고 토닥토닥 덜하고 눕혔다고 금방 먹은 뽀얀 젖을 게워 애를 태우던 아주 작은 아가가 떠올랐다. 맞다 이렇게 작았었지. 손목에 머리를 두면 발가락이 팔꿈치에 닿을 만큼 작은 아가들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 아가 냄새가 날까 하고 코를 대보았다. 아이들이 이렇게 작을 때는 세면대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놓고 향이 거의 없는 하얗고 네모난 아가 비누로 가만가만 손빨래를 했다. 습도를 맞추느라 물기를 꼭 짠 배냇저고리를 아가 자는 머리맡에 널어두곤 했는데 알감자 포슬포슬 삶듯 익어가는 발그레하고 따뜻한 녀석들의 볼에서 맡아지던 낮잠의 냄새를 맡아보고 싶었던 것이다.무엇을 비워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린 손이 자꾸만 멈춘다. 몇 시간이나 앉아있었지만 별 성과가 없어 털고 나와 뜨거운 차 한 잔을 만들어 마시며 생각했다.

더 이상 인화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빛이 다 들어간 필름들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서. 그것은 돌아갈 수 없는 젊은 시간을 물리적으로 쥐고 있는 것에서 얻는 헛헛한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수많은 가치의 기준이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 다행인 일이기도 하다. 꽃같이 예쁘고 좋았던 시간이지만 이제 그만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덤으로 생겼다는 것도. 좋았던 것이라고 해도 넘치도록 모두 다 끌어안고 살 수는 없으니 이제 그만 비우기로 마음먹는다.

비워낸 서랍에는 나날 아주 사소해서 소중한 이야기가 담긴 오늘과 내일의우리들이 담길 것이다.아. 그렇더라도 배냇저고리는 새로 개켜 조금 더 깊은 옷장 속에 넣어두기로 한다.

작아지고 낡고 헛헛한 것들을 비우는 와중에도. 아마도 그 깊은 공간에서 계절이 가고 나이를 먹는 것의 구애 없이 나는 그것을 아주 오래도록 보관할 모양이다. 일곱 살이 여덟 살이 되고 네 살이 다섯 살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나와 남편보다 키를 더 키우고는 오디션 속의 그 아이처럼 제 꿈을 위해 어딘가에 나서게 될 때까지. 놀이터에서 미끄럼을 타느라 엉덩이가 새까매진 바지와 토마토 국물이 함부로 흐른 여름의 티셔츠들과 크레파스가 잔뜩 묻은 소매와 축구를 하느라 엉망이 된 바짓단을 비벼 빨아 서랍을 채워주면서. 두 녀석 자라는 동안 중요한 날들이 찾아왔을 때, 어느 때쯤부터는 제 손들로 직접 옷을 고르고 입게 될 테지만 바삐 나서는 아이들을 현관 앞에 잠깐 멈춰 세워놓고 (사내녀석들 끌어안으면 쑥스럽다 싫어할 테니) “잘하고 와, 잘할 수 있어.”하는 말 대신 어깨 판판 털어주고 깃을 꼭꼭 눌러 펴주게되겠지.

그렇게 차곡차곡 녀석들의 키만큼 시간을 쌓아가며 열심히 사느라 이렇게 작은 배냇저고리를 옷장 깊이 넣어두었다는 기억까지도 잊어버리고 말 때까지. 그러다가 두 아이가 지금의 나와 남편만큼 나이를 먹고 다시 아주 작은 아이를 낳게 되면 그때 깨친 듯 떠올려 꺼내 보여주어야겠다. 작은 집 사는 동안 나는 수없이 계절 갈이를 하고 군짐들을 비우며 살림을 꾸려나가겠지만 마지막까지 남을 아주 귀한 것. 옛날옛날부터 아주 오래도록 수많은 엄마들이 그래 온 것처럼 이 옷 하나만큼은 품고 살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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